힘없는 아이가 당하는 언어폭력 … 그것보다 더 잔인한 게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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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는 일본의 한신백화점 지하보도에서 하이힐을 신고 걷는 남성 부랑자를 보고 새 소설의 화자를 떠올렸다. 소설은 그 기괴하지만 압도적인 광경으로 시작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00년대 후반 등장한 젊은 작가를 거론할 때 황정은(37)은 거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이름이다. 첫 장편 『白의 그림자』(2010)는 발표 직후 평단과 독자의 찬사를 받았다. 묵직한 이야기를 낯선 방식으로 전하는 이 영민한 작가가 두 번째 장편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를 냈다. 162쪽의 얇은 분량이지만 본격적으로 ‘폭력’에 가 닿은, 결코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계간지에 발표한 것을 퇴고하려고 다시 펼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어요. 심정적으로 소모가 많이 되더군요. 노골적으로 가혹한 이야기니까요.”

 소설은 재개발을 앞두고 전 주민이 보상금에 목 멘 가상의 도시 ‘고모리’가 배경이다. 이 야만의 세계에 사는 소년 앨리시어는 엄마의 무차별적인 구타와 주위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다.

 “난폭한 세계에 던져진 화자죠. 자기가 경험한 세계 이외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 그게 저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들이 무심하게 외면당할 때는 어른들이 돈에 눈이 멀 때인 것 같아요. 저도 5년 정도 그런 지역에서 살아 본 적이 있어요.”

 작가가 특히 주목한 것은 언어폭력이다. 엄마는 구타와 함께 ‘씨발’을 입에 달고 산다. 작가는 이 상황을 ‘그건 그냥 씨발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씨발적인 상태다’(40쪽)라고 썼다.

 “저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심한 욕이에요. 가장 흔한 욕이지만, 어린 형제에겐 아주 특별하고, 잔인하고, 날카롭고 더러운 말이겠죠. 물리적 폭력보다 정서적으로 얻어 맞을 때 그 폭력의 강도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해요.”

  앨리시어는 독한 욕설을 잊기 위해 밤마다 동생에게 엉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토끼굴에 떨어져 다른 세계로 가는 ‘신기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 중 하나다. 하지만 형제는 앨리스처럼 다른 세계로 가지 못한다. 바닥에 닿지 못하고 계속해서 추락하는 비극 속에 사는 것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르고, 그것을 마침내 찾았다고 여기는 순간 가장 소중한 것(동생)을 잃게 되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실패한 화자라고 말할 수 있어요.”

 소설은 거리의 부랑자가 된 앨리시어가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하지만 작가는 현재형 시제를 고집했다. 과거의 일이 지금도 악몽처럼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세상이 정말 아슬아슬해요. 사는 게 힘들죠. 구체적인 예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있잖아요. 인류의 멸절이 머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아요. 공룡이 멸종되는 데 2만년 이상 걸린 것처럼. 그렇다면 이 고통스럽고 긴 시간을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앨리시어는 소설 속에서 자주 ‘그대’를 부른다. ‘그대와 나의 이야기는 언제고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천천히 올 것이고, 그대와 나는 고통스러울 것이다.’(162쪽) 여기서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작가가 독자의 책에 사인을 하며, 그들의 이름 앞에 붙이는 수식어를 보고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은 ‘단 한 사람 그대’였다.

글=김효은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황정은 신작 『야만적 앨리스…』
재개발 지역 방치된 아이들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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