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억 들인 스타비스, 0% 확률서 우승 일군 신병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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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호 19면

1일 밤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류중일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대구=뉴스1]

“삼성요? 팀 타율 3할입니다. 한국 프로야구에 존재하지 않았던 역대 최고의 팀이죠. 이번에는 해태가 이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근 12년간 KS 6회 우승, 삼성 야구 탐구

 1987년 한국시리즈(KS)를 앞두고 김응용 해태 감독(현 한화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원래 큰 경기를 앞두고 엄살을 떠는 그였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뛰어난 타자라고 해도 타율 0.300을 기록하기 쉽지 않다. 그해 삼성은 정규시즌 팀 타율이 꼭 0.300이었다. 이만수·장효조·김성래·허규옥 등 특급 타자들이 즐비했다. 해태에도 좋은 타자가 많았지만 팀 타율은 0.252였다.

 그해 KS는 해태의 4연승으로 싱겁게 끝났다. 1차전부터 해태는 한대화가 삼성 투수 김시진을 상대로 투런홈런을 터뜨리며 기세를 잡았다. 1~3차전 모두 해태가 1점 차, 혹은 2점 차로 이겼다. 마지막 4차전에서 삼성은 김시진을 다시 내세웠지만 김준환에게 역전 투런포를 맞아 2-8로 완패했다. KS에서 삼성 타자들은 무기력했다. 삼성은 프로 원년인 82년 OB(현 두산)와 KS에서 만났지만 6차전에서 김유동에게 역전 만루홈런을 맞았다. 84년에는 홀로 KS 4승을 거둔 롯데 최동원의 혼신투에 막혀 3승4패로 졌다. 최강 팀 삼성이 KS에서 번번이 무너지자 포스트시즌 제도가 바뀌었다. 85년에는 전반기 챔피언과 후반기 챔피언이 KS를 벌이기로 했는데 삼성이 전·후반기를 모두 우승하며 KS가 아예 열리지 않았다.

 이듬해인 86년엔 KS가 부활했고, 삼성은 해태에 1승3패로 졌다. 87년엔 팀 타율 0.300을 때리고도 해태에 패했다. 삼성은 2002년 두산을 꺾고 처음으로 KS에서 우승하기까지 일곱 번이나 준우승에 그쳤다. 제일주의를 외치는 삼성 모기업에 21년 동안 KS에서 우승하지 못한 야구단은 큰 고민거리였다.

역전의 희생양이 역전의 명수로
2013년 11월 1일 대구구장. KS 7차전에서 삼성은 1회 초 선제점을 빼앗겼다. 1-1이던 3회 초 다시 점수를 내줬다. 그러나 삼성은 2-2 동점에 성공했고 6회 말 대거 6득점해 7-3 승리를 거뒀다. 1, 2차전을 내주고 4차전까지 1승3패로 밀렸던 삼성은 5~7차전을 모두 이기며 기적 같은 역전우승에 성공했다. 이전까지 KS에서 1승3패로 밀린 13개 팀은 시리즈에서 모두 졌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0%의 기적을 만들었다”며 감격했다.

 삼성 선수들은 여유가 있었다. 승리를 확정한 후 그들은 마운드에 모여 마무리 투수 오승환의 지휘로 일사불란하게 ‘활시위 세리머니’를 했다. 12년 전 KS 첫 우승 때 대구구장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그러나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정규시즌과 KS에서 통합 우승한, 최근 12년간 여섯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그들은 신나게 우승을 즐기고 있었다.

 2013년 가을야구는 참 뜨거웠다. 2008년 창단 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넥센은 준플레이오프에서 2승을 먼저 따내고도 두산에 3연패했다. LG는 2002년 KS 준우승 이후 10년 동안 가을야구에 참가하지 못하다 올 시즌 삼성과 막판까지 1, 2위를 다퉜다.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LG는 잠실 라이벌 두산에 1승3패로 무너졌다.

 주인공은 두산으로 바뀌었다. 넥센·LG와 아홉 경기를 치르며 많이 다치고 지쳤던 두산은 삼성에 2연승을 거뒀다. 2011년 삼성 감독에 부임하자마자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했던 류 감독의 연승행진도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삼성은 대역전극에 성공하며 두산을 빛나는 조연으로 만들었다.

 프로야구는 삼성의 눈물을 먹고 자랐다. 82년 KS에서 이선희가 김유동에게 만루홈런을 맞은 순간부터 그랬다. 영남 연고와 거대 모기업을 가진 삼성은 정치적으로 소외됐던 광주 연고의 가난한 기업 해태에 매번 당했다. 최고의 스타들이 최고의 기록을 올렸지만 마지막 승부에서 결국 지는 것, 그게 삼성의 아픈 역사였다.

 삼성에는 수많은 스타가 있었다. 연고지의 경북고와 대구상고(현 상원고)가 젖줄 역할을 했고, 막강한 자금을 앞세워 비싼 선수들을 사들였다. 김시진·김일융 등 특급 투수들도 있었지만 팀 타율 0.300을 기록한 타자들이 대부분 주역이었다. 1990년대에도 괴물타자 양준혁, 국민타자 이승엽이 주축이었다.

 과거부터 야구 선진국과 활발하게 교류한 삼성은 화끈한 야구를 추구했다. 미국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 스타일, 일본 요미우리 방식을 따랐다. 타력 위주의 선 굵은 야구는 KS 같은 단기전에 효과적이지 못했다. 스타 선수가 많은 만큼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싹틀 여지가 있었다.

시스템은 스타·리더십만큼 귀한 자산
수많은 역전의 희생양이 되었던 삼성은 2000년을 전후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1998년 해태 마무리 임창용을 받고 양준혁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단행한 게 대표적이었다. 2001년엔 아예 해태 사령탑 김응용을 삼성 감독으로 영입했다. 삼성은 김 감독과 프로야구 사상 최장 기간인 5년 계약을 했다. 과거의 삼성을 깨끗이 잊고 해태를 이식하겠다는 의지였다. 해태에서 아홉 차례나 KS 우승을 이룬 김 감독에게 장기간 동안 전권을 준다는 메시지를 선수들에게 전한 것이다.

 스타 군단에 ‘우승 청부사’가 오자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다. 김 감독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삼성의 스타 선수들을 장악했다. 2001년 KS에서 두산에 역전패하긴 했지만 2002년 LG를 꺾고 삼성은 사상 첫 KS 우승을 차지했다.

 2000년대 초반의 최강 팀은 현대(현 넥센)였다. 현대는 1998, 2000, 2003, 2004년 KS에서 우승했다. 2004년의 제물은 삼성이었다. 삼성은 김 감독을 구단 사장으로 임명하고, 선동열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승격했다.

 선 감독 영입은 해태 선수 출신의 ‘우승 청부사’를 영입했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일본 주니치에서 뛰면서 강력한 불펜 운영을 경험한 선 감독의 노하우를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었다. 선 감독은 선발 배영수와 강력한 마무리 오승환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마운드를 구축해 2005, 2006년 KS에서 우승했다.

 마운드 위주의 ‘지키는 야구’는 필연적으로 공격력 약화를 불러왔다. 선 감독이 물러난 2011년 이후엔 ‘시스템 야구’가 삼성에 뿌리내렸다. 리더에 따라 팀 컬러가 크게 바뀌는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1987년 입단해 선수로 13년, 코치로 12년 동안 삼성에만 몸담은 류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그는 구단 프런트와 잘 협조했고, 선수들을 부드럽게 감쌌다. 삼성은 류 감독 선임을 통해 안정적으로 팀이 운영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오랫동안 축적해 온 실패의 경험은 시스템 야구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삼성은 2011년 35억원을 주고 개발한 통합정보시스템 ‘스타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삼성 선수들은 모바일로 기록과 영상을 전송받아 경기에 응용하고 있다. 최근 3년 우승하는 동안 배영섭·김상수·정형식·심창민·이지영 등 젊은 선수들이 2군에서 올라왔다. 국내 최고의 2군 훈련장으로 꼽히는 경산볼파크에서 성장한 선수들이다.

 특급 스타가 막혀도, 강력한 리더십이 없어도 이제 삼성은 강하다. 2013년 KS에서 이승엽과 배영수 등 특급 스타들이 부진했지만 삼성은 끝내 정상을 지켜냈다. 21세기 들어 최강 팀 삼성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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