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평화 공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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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최근 미·중공 관계가 해빙의 징조를 보이게 됨에 따라 격동하게된 세계 정세가 한국의 남·북 관계에 미칠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하고 국제 정치상 한국의 진로를 모색하는 토론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변화의 도전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국가 이익을 추구키 위해 현실적인 대책을 강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국의 좌표에 큰 영향을 주게될 객관 정세의 변화에 대해서 정부도 국민도 별로 당황치 않고 냉정히 현실을 주시하고 한국의 활로를 개척해 나가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국제적인 해빙 무드에 있어서 우리가 전향적인 자세로 현실 적응의 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해 나가는데 있어서 늘 주의하고 자생해야할 점이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이데올로기」상의 대립과 국제 권력 정치상 국가간의 이합집산을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우익 소아병에 걸려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가지고, 「이데올로기」와 외교 정책을 전혀 구별치 못하는 자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2차 대전 당시 미·영 등 자유 대국이 사회주의 국가 소련과 긴밀한 접촉을 가지면서 『반「파시즘」통일 전선』을 형성했던 사실이나, 60년대 이후 지금까지 미·소가 평화 공존하여 왔고 또 70년대 미국이 중공과 평화 공존 하기를 원하게 된 사유가 도시 불가해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국이 그 국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혹은 공산 국가와 제휴하고, 혹은 평화 공존하기도 하지만, 미국이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나 사회 체제를 용납해본 일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로 공산주의가 밉기 때문에 그 변질을 촉구하기 위해 공산 국가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압력을 가하기도 하고, 평화 공존하기도 하면서 공산권의 결속을 정략적으로 막아 왔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새로운 좌표를 설정해야할 오늘의 한국 국민으로서도 선진 대국의 이러한 신축성 있는 태도는 충분히 본받아야할 것인 바, 우리 국민 가운데 아직도 공산권에 대한 접촉이라면 덮어놓고 위험시하는 사고 방식에 사로 잡혀 국가 이익의 현실적인 충족의 기회를 놓지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역사의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반면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이른바 동·서간의 평화 공존이 절대로 『이데올로기의 평화 공존』을 의미치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와 평화 공존을 강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소련의 최고령 지도자였던 흐루시초프이다. 그는 「평화 공존 공세」를 가지고 냉전으로 얼어붙었던 세계의 긴장 완화의 신풍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평화 공존이 절대로 「이데올로기」상의 평화 공존을 의미치 않는다고 강조했던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평화 공존이란, 어디까지나 세계의 적화 혁명이라는 그들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키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결코 계급 투쟁의 중단 내지 포기를 의미치 않으며,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나, 자유 사회 체제에 대한 적대적 증오를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 것도 바로 흐루시초프였던 것이다. 자유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점을 특히 잘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가 다른 강대국이 서로를 평화 공존을 지향하면서 움직이게 됐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의 완화 내지 포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물며 국제 정세의 변화가 있었다하여 주변의 평화 무드에 도취되어 원칙 없는 통일론이나 유화론을 난무시키는 따위의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한국을 에워싼 정세가 격변할수록 우리에게는 공산주의에 대한 더욱 철저한 사상 투쟁을 강화치 않으면 안될 필요성이 늘어날 것이다. 미국이 중공과 접근을 시도하게 됐다해서 사상 전상 대립의 긴장마저 풀리리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터무니없는 오산일 것임을 강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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