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이 돌아온다니 이게 정말입니까" 망부26년 목멘 「소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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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감님이 돌아온다니 이게 정말 생시입니까?』 부산시 초량 6동 장소아할머니(69)는 해방된 45년부터 지금까지 생사의 소식조차 모르던 남편 손치규씨(70)가 10일 「사할린」의 억류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목메어있다.
26년만의 재회를 앞둔 노부부의 고향은 전북 고창군 고창읍. 손씨는 20세, 장 할머니가 19세 때 중매결혼하여 제2차대전이 터져 일본군벌이 한국인을 징용으로 끌어가는 40년까지, 18년 동안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5남매를 두고 있었다.
손씨는 38세가 되던 해인 41년에 징용으로 동원되었고 뒤이어 큰아들 종운씨도 징용에 끌려갔었다. 손씨 부자가 징용간 곳은 「사할린」(당시는「가라후또」=(화태)의 탄광이었다.
그 무렵 이 탄광에는 많은 한국인이 와 있었다.
손씨는 4년 뒤인 1945년 봄에 장 할머니 등 나머지 가족들을 모두 「사할린」으로 데려갔었다.
가라후또 탄광지대서의 생활은 비참했지만 배급 나오는 식량으로 굶는 것은 면할 수 있었고 손노인과 종운씨는 열심히 일했다.
둘째아들 종영(42)씨는 운전기술을 배워 군용차의 운전사가 되어 일하는 가운데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일본군은 한국인들에게 북해도로 피난가라고 강요, 손 노인이 이때 장 할머니에게 두딸 그리고 막내아들을 데리고 먼저 피난하도록 일러 장 할머니는 남편과 아들 형제를 남긴 채 북해도로 건너온 것이 26년 동안의 생이별의 시초가 된 것이다.
3년 뒤에 둘째아들 종영씨가 마지막 송환선을 타고 돌아왔으나 손씨와 큰아들 종운씨는 소련군에 의해 영영 억류되어 되돌아오지 못했다.
장 할머니와 가족들은 북해도에서 남편이 뒤따라오기를 기다리다 못해 47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편과 아들을 생전에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다는 것.
그러나 다행하게도 큰아들 종운씨는 「사할린」에서 일본여인과 결혼, 이름을 「나리따」 (성전정술)로 개명했기 때문에 50년께 일본으로 송환되어 북해도에 정착한 것이다.
큰아들 종운씨는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여러 차례 진정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는데 지난 5년 전부터 차차 소련측의 태도가 누그러져 계속 송환을 진정한 결과 최종거주지가 한국이란 조건으로 송환이 허가되어 소련 선박편으로 일본을 거쳐 귀국하게 된 것.
한편 고향에 돌아온 장 할머니는 아들 종영(42) 종호(35) 등 형제를 혼자힘으로 공부시켰다. 지금은 외항선원이 되어 부산으로 옮겨있는 종영씨 집에 살고있다.
장 할머니는 아들·손자와 함께 잘 지내고 있지만 하루라도 남편 생각을 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뜻밖에 5년 전 남편이 진정서를 내는 등 송환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큰아들로부터 편지로 전해 듣고 『혹시나…』했지만 생전에 만나리라고 믿지 못한 것이 막상 돌아온다고 하니 마치 시집가던 날과 같이 재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이 집은 며느리·손자 등 온가족이 얼굴조차 모르는 할아버지 맞기에 들떠있다. <부산=이무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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