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유행을 좇지 않아요, 사람 피부가 먼저니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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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 있는 도르나노 저택에 모인 도르나노 백작 부부 가족. 모두 ‘시슬리’에서 일하고 있다. 위베르 도르나노 시슬리 회장과 그의 아들 필리프 사장, 딸 크리스틴 부사장, 부인 이자벨 부회장(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 [사진 시슬리]

위베르 도르나노(87) 백작. 아흔을 바라보는 그는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소비자가 신뢰할 수 있는 화장품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60년 넘게 화장품 사업만 해온 도르나노 백작이 그의 부인 이자벨(76)과 함께 1976년 프랑스에서 창업한 화장품 브랜드 ‘시슬리’를 두고 한 얘기다. 지난해 말 미국의 경제전문 잡지 ‘포브스’는 도르나노 백작이 재산 13억 달러(약 1조4300억원)로 프랑스 억만장자 대열에 새로 합류했다고 보도했다. 2000년대 후반 한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시슬리 브랜드가 크게 성공한 데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프랑스 파리 시내 센 강 남쪽 오르세 둑방길에 있는 도르나노 저택에서 백작 부부를 만났다. 세자르·고갱 등 유명 화가의 작품 수백 점이 들어찬 갤러리 같은 곳이었다.

위베르 도르나노 시슬리 회장의 가문은 나폴레옹 1세 황제 때인 18세기 백작 칭호를 얻었다. 나폴레옹 황제의 6촌 동생으로 육군 원수를 지낸 그의 할아버지가 무공을 세워 받은 작위다. 위베르 도르나노 회장의 부인 이자벨 도르나노 시슬리 부회장은 폴란드의 귀족 가문 출신. 16세기 이래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지에서 재력·권력·명예를 모두 가졌던 라치비우(Radziwill) 가문 출신이다. 이자벨은 젊은 시절 유럽의 패션·사교계에서 인기가 높았던 재원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와 폴란드의 귀족 남녀는 유럽 일대 사교 모임에서 종종 마주쳤고 결혼했다. 영국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던 이자벨이 휴가차 파리에 들렀다 위베르를 만난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후 스페인·프랑스·영국 등지를 오가며 사랑을 키웠다. 이자벨은 “열일곱에 처음 만나 5년 뒤 결혼했다”고 했다. “남편 집안이 본래 화장품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식물 추출물로 새로운 제품, 새 브랜드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더라. 어떤 영감이 떠올랐다. 하던 패션 일을 접고 남편 집안의 화장품 사업에 합류한 게 시슬리 브랜드의 시작이다.”

유행보다 믿을 수 있는 화장품에 몰두

도르나노 가문은 190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화장품 산업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해왔다. 이름만 대면 아는, 몇몇 화장품은 도르나노 가문이 창업하고 키워낸 브랜드다. 도르나노는 현재 시슬리 외 모든 화장품에서 손을 뗐고, 예전 관여한 브랜드에 대해선 어떤 인터뷰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일종의 ‘신사협정’이라고 했다.

위베르 도르나노 회장이 나이 50에 새로 시작한 시슬리는 방 3개짜리 사무실에서 직원 15명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위베르 회장은 창업 당시가 생생한 듯 신이 난 얼굴로 설명했다. “피토(phyto), 즉 식물 추출성분을 활용한 화장품으로 새 브랜드를 시작했다. 당시엔 대중에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었지만 이 컨셉트가 소비자에게 매력적일 것이라 확신했다. 화장품, 피부에 바르는 무엇인가는 옛적부터 자연에서 얻은 것으로 만들어 왔다. 본래 화장품을 만드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었단 얘기다. 그래서 연구원들과 함께 최상의 피토 화장품을 만드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 결과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브랜드를 시작했을 때 냈던 같은 개념 화장품이 베스트셀러다.”

이자벨 부회장이 덧붙여 설명했다. “화장품 브랜드 창업자 혹은 소유주가 유행을 좇는다면, 그 회사 연구원들도 마찬가지로 유행에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다. 소유주가 원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기초 화장품 분야에 집중하는 우리 회사의 경우 재빠르게 변하는 소비자 취향에 맞춰 제품을 개발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소비자가 믿고 계속해서 살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제품을 만드는 게 먼저다. 이런 원칙을 40년 가까이 지켜 왔다. 우리 연구원들도 유행보다는 성분에만 집중해 제품을 개발하는 데 더 익숙하다.”

도르나노 백작 부부는 “식물이 미래의 석유가 될 것이라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석유를 원료로 각종 화학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식물을 근본으로 해서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때가 올 거라고 믿어 왔다. 문제는 식물의 특정 성분을 어디에 쓸 것인지, 어떻게 효능 있게 만들 것인지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다. 시슬리가 하는 일은 각종 식물에서 사람의 피부에 가장 좋은 성분을 찾아내고, 이것을 화장품이란 제품에 가장 유효 적절하게 구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회장 부부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원칙에 따라 피부에 좋은 특정 식물 성분을 새 화장품으로 탈바꿈시키는 데는 최소 1~2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성분을 추출하고 제품을 만든 다음 실제 피부에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꼼꼼하게 실험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도르나노 회장은 “지금껏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제품을 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게 우리의 임무여서다.”

광고·마케팅으로 뜬 화장품 오래 못 가

평생을 화장품 사업에 몸바친 전문가의 눈에 비친 요즘 화장품, 요즘 소비자는 어떨까가 궁금해졌다. ‘비싼 화장품 제값 못한다’ ‘성분 비슷한데도 값만 비싼 수입 화장품’ 같이 화장품을 둘러싼 해묵은 논란에 대해 물었다. 이자벨 부회장은 자동차를 예로 들었다. “흔히들 아는 대중 브랜드 차를 타는 것과, 누구나 부러워하는 ‘명차’를 타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어떤 차를 타든 목적지에 도달하는 건 마찬가지다. 이동 수단이란 목적에선 똑같은데 차를 타는 사람이 느끼는 만족감은 아주 많이 다르다. 명차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 같은 것을 느끼며 차를 타게 되니 그렇다. 이처럼 소비자가 높은 값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는, 신뢰할 만한 상품을 만드는 게 화장품 제조업자들의 몫이다. 물론 최상의 품질은 기본이 돼야 하고. 그렇게 만들지 못하면 처음엔 사람들이 (광고나 마케팅에 속아서) 제품을 살 수 있지만 다시 또 그 제품을 사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화장품은, 그 브랜드는 계속해서 존재하기 힘들 것이고. 시슬리 브랜드도 가격에 따라 몇 가지 제품군으로 나뉜다. 흥미로운 건 가장 비싼 ‘시슬리야’ 제품군이 가장 잘 팔린단 사실이다. 시슬리를 신뢰하고 반복해서 구입하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여성들, 한 번에 화장품 바르는 개수 세계 최고’라는 뉴스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어떨까. 회장 부부는 아들 필리프 도르나노 시슬리 사장의 한국 사랑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아들(필리프 사장)은 시슬리 한국지사 직원들과 정기적으로 북한산에 오를 정도로 한국에 애착이 많다”고 했다. 한국에 대해 그만큼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자벨 부회장은 “한국 여성들의 까다로운 화장품 취향, 열성적인 화장품 사용에 대해 익히 들었다. 한국 여성들 피부가 좋다는 것 역시 오래 전부터 알고 있다. 요즘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한국 여성들 피부가 좋은 걸 인정한다고 들었다. 여러 가지 제품을 덧바르는 한국 여성들의 화장품 사용 습관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국 여성들의 아름다운 피부는 까다로운 취향과 복잡한 사용 습관이 만든 결과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사용법이 유럽이나 미국 여성들에겐 익숙하지 않다. 자꾸 비교를 해서 말들 하는데, 결과에서 차이가 드러나지 않나(웃음).”

파리= 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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