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3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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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짓밟음. 바람 비. 수레바퀴 침뱉음을
오랫동안 말 없이 참아온 나다.

-설창수

하늘이 처음 열린 날이 있다. 단군왕검 신시에 내리시어 나라 세우신 날을 개천절로 정하고 겨레는 정성을 바쳐 제사를 올린다. 이 민족의 성스러운 경축일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민족혼을 신명 나는 예술 한마당으로 일깨워야 한다고 횃불을 들고 일어선 선각자가 있으니 파성(巴城)설창수 시인이다.

파성은 1916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니혼(日本)대학 예술학원 창작과를 중퇴하고 일제하에서 사상범으로 체포돼 2년간 복역한다. 광복 다음 해인 46년 경남일보 주필겸 사장을 맡아 필봉을 휘두르면서 동인지 '등불'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파성은 49년 서른 세살의 나이로 영남예술제를 창안하고 집행한다.

진주가 영남권의 역사.문화의 발상지며 중심지라고 믿는 파성은 개천절인 음력 10월3일, 진주에서 문화민족의 역량에 불붙이는 향불을 개국의 제단에 성대하게 올린다.

제1회 영남예술제에서 이형기.박재삼이 고등학생으로 나란히 시부 장원, 차상에 뽑혔으니 이 예술제가 영남권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디딤돌이 되었음을 읽을 만하다. 제 10회부터 이름을 개천예술제로 바꿔 개국의 정신을 받들고 영남권만이 아닌 전국 규모의 민족제전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 민족축전의 제사장으로, 언론인으로, 시인으로 폭넓은 인지도를 갖게된 파성은 4.19혁명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6년제 참의원으로 당선, 중앙정치 무대로 나아간다. 그러나 5.16을 만나 짧은 의정활동은 마감된다.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는 박정희 의장은 대구 시절부터 친구였고 5.16 때 몸을 숨겨준 은인이기도 했던 구상에게 때묻지 않은 새 인물의 추천을 의뢰한다. 구상은 친형 처럼 위하는 파성을 천거하고 설득하지만 파성은 "일본군 육군 중위와는 손을 잡지 않는다"고 막무가내다.

문공장관.중앙언론사 사장 같은 자리를 박차고 나선 파성은 개천예술제 마저 군사정권의 어용으로 타락해가고 있다고 예술제가 열리는 기간은 진주 밖으로 나가서 떠돈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는 백이숙제를 본땄음인가, 파성은 전국을 돌며 시화전을 연다. 그 횟수가 무려 2백20여회, 심지어 면 단위까지고 돌아다녔으니 파성 특유의 서체로 만들어진 시화는 몇 천점 쯤 전국 방방곡곡에서 묵향을 뿌리고 있으리라.

개천예술제는 6.25 나던 해와 10.26이 나던 해만 거르고 오늘까지 49회째 민족제전으로 이어오고 있다. 파성은 구상과 함께 공초 오상순 모시기에도 정성을 바쳐 빨래골 공초제에도 천리길 마다 않고 오셨었다. 그때 추모사에서 "공초는 우주의 컨덕터(지휘자)"라고 하신 말씀을 나는 시로 썼다.

85년 문단 일각에서 새로운 문학단체 '한국문학협회'를 결성했을 때 몸 사리는 선배들과 달리 선뜻 회장직을 수락, 짧은 동안이지만 문단사의 한 장의 기록을 이끄셨다.

배달겨레의 옷차림인 한복 정장에 흰 두루마기를 언제나 입으시던 파성 선생. 시대와의 불화에 지친 걸음으로 98년 6월 26일 82세로 하늘 열리는 곳으로 가셨다. 불의를 꾸짖는 그 사자후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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