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우리 막내 고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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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호 34면

막내 고모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와 나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겨우 1년 만인데 그 사이 고모는 부쩍 늙었다. 병이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빼앗아 가는 것이 웃음과 생기일 것이다. 그래도 고모는 낙천적이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 문병 온 조카 내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대개는 고모보다 이모다. 양쪽 모두 부모의 여형제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고모보다 이모가 더 가깝고 정다우며 애틋하게 느껴진다. 식당이나 술집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마 이모집, 이모식당이 훨씬 많을 것이다. 또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에게도 “이모”라고 부른다. 그것은 아버지 쪽보다는 어머니 쪽의 사랑이 더 직접적이고 무조건적일 텐데 그런 영향이 부모의 동기간에도 고스란히 옮아가는 것 아닐까? 조카 역시 고모보다는 이모를 더 살가워하고 따른다. 대개는 말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이모보다 고모를 더 좋아하고 따랐다. 막내 고모를. 고모는 결혼할 때까지 한동안 우리와 함께 살았다. 어릴 때부터 한 동기간처럼 자라 더 살뜰한 정이 들었는지 모른다. 고모는 조카 중에서도 특히 내게 잘해주었다. 장조카라고 늘 챙겨주고 돌봐주었다. 마치 큰누나 같았다. 철없는 나는 그런 고모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놀리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하루는 무슨 일인가 나는 고모의 화를 돋우었는데 화난 고모의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는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약을 올렸다. 고모가 잡으러 오니까 나는 더 신나서 요리조리 달아나며 계속 고모를 골렸다. 쫓아오는 고모를 놀리며 동네를 벗어나 아스팔트가 있는 한길까지 도망갔는데, 그러다 그만 넘어졌다.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났다. 아프기도 했지만 고모에게 혼날 생각에 나는 울었다. 고모는 자신의 분이나 화는 어느새 다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가 다친 것처럼 울상이 되어 나를 일으켜 세우고 상처를 살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못된 조카 녀석을 업어주기까지 했다.

문병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고모가 내게 물었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처음 식사하고 갔을 때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거니?”

막내 고모가 아직 신혼이었을 때 나는 고모의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고모는 나를 장조카라고 어려워했는데 그래서였을까.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초대한 것이다. 겨우 중학교 1학년 조카에게 말이다. 고모는 손수 정성껏 차린 밥을 냈는데 나는 그런 분위기가 너무 어렵고 어색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고모와 아직 서먹한 고모부와 나, 셋이 식사를 했다. 어른처럼 대접을 받으니 어른처럼 굴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의젓하고 어른스럽게 식사했다. 허리도 반듯하게 펴고 이야기도 하지 않고 조용히, 천천히 먹었다. 국도 숟가락으로 떠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삼켰다. 굴비와 소시지 반찬으로 자꾸만 가는 젓가락을 참으며 말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굳이 고모가 바래다주겠다는 것이다. 고모의 신혼 집과 우리 집은 채 100미터도 안 떨어져 있는데 말이다. 집에 다 왔을 때 의젓한 조카에게 막내 고모가 물었다. “그런데 장조카, 왜 밥 한 술 뜨고 숟가락을 놓고 또 국 한 번 먹고 숟가락을 놓고 그랬니?”

그때 나는 너무 부끄러워 대답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하고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쾅 닫아버렸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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