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묘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사람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공수래 공수거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도 한 뼘의 땅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땅속에 파묻는 관습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다. 「호머」의 시대, 희랍사람들은 땅속에 파 묻혀야 비로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잠잘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영혼은 안식처를 찾지 못해 언제까지나 울면서 공중을 날아다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소포클레스가 그린 여주인공「안티고네」의 비극도 이런 신앙에서 싹텄다. 그녀의 오라버니는 죽은 다음에도 왕의 명으로 매장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것을 애처롭게 여긴「안티고네」는 드디어 왕명을 어기고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매장하려다 들켜 죽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불멸을 믿은 고대 이집트인은 사자의 무덤을 잘 써야 죽은 자가 언젠가 되살아난다고 여겼었다. 그래서 재생의 신 오시리스를 죽인 동생인 그의 완전한 죽음을 꾀하여 시체를 토막내어 그냥 공중에 뿌렸었다.
이래서 서양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는 관습이 뿌리박게 되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18세기까지의「프랑스」의 연극배우들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 사람들은 항상 남을 흉내냄으로써 그들 자신의 영혼을 부정해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죽으면 몰래 외진 곳에 묻히기 마련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부터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영혼이 집안을 돌봐주고 지켜준다고 보았다. 자손들의 입장에서는 물론 정애를 쏟았던 조상들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드린다는 영교적인 효심도 있었을 것이다.「묘즉효심」을 연상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묘에서 가문의 역사를, 선조의 공적을, 또는 스스로의 영화를 생각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역시 인간의 존엄은 사자로 하여금 곱게 잠들게 한다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무리 가난해도 죽은 사람에게는 한 뼘의 땅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제 서울 근교의 공동묘지에서는 묘를 찾지 못한 성묘 객의 서러움이 더 컸다. 까닭은 강남개발을 위한 공동묘지 이장작업이 너무 거칠었기 때문인가 보다.
임자가 뒤바뀐 묘, 유연묘가 무연묘로 둔갑된 것, 합장된 것….
어느 방송은 묘를 찾다 지친 어느 여인의 울먹이는 소리를 들려줬다. 그것은 신을 향해 울부짖는「안티고네」보다 더 우리에게는 애처롭게 들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