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문이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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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한문이 드디어 덕수궁으로 돌아간다. 노상에 버려진지 2년 만이다. 불과 10m 거리를 옮겨 앉는데 그만한 시간이 걸린 것은 생정의 「사보타지」이다.
문화재를 광신적으로 떠받들려는 태도는 좋지 않다. 그러나 대한문의 이건을 주장해온 것은 그런 태도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대한문은 덕수궁의 일체이지, 그 분신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것은 행정의 독선이 빚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대쉼」 하는 도시계획의 발길엔 대한문 따위는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이상은 「아스팔트」 「하이웨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꽃피우려는 데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기왓장 하나라도 소중히 간수하려는 것은 한낱 상고주의 적 취미만은 아니다.
대한문은 우리 민족의 함성을 상징하고 있다. 1907년 일본은 고종제를 일본으로 압송하려던 사건이 있었다. 「해아밀사」를 조종한 장본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이때 서울시민은 스스로 결사회를 조직했다. 그들은 바로 대한문 앞에 진을 치고 항의했다. 이 사건은 근세 한국사를 움직인 뜨거운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1919년 1월23일 고종이 승하한 곳도 이 덕수궁에 서였다. 망국의 임금으로 유폐 13년. 민중들은 그 울분을 이 문전에서 폭발시켰다. 바로 삼·일 운동의 계기는 이것이었다.
대한문이 함축하는 정신사적가치는 이처럼 깊다.
덕수궁의 담벼락 이전 계획 속에 대한문 이건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행정의 폭력이다. 선 집행·후 예산의 사고부터가 잘못되어있다. 비단 대한문의 경우뿐이 아니다.
문화재의 당초 태도도 고답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한문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할 이유는 없다. 「멕시코」의 혁명박물관은 인류의 문화재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들은 혁명의 정신을 간직할만한 문화재들을 야외의 한 장소로 모두 옮겨 놓았다.
그것대로 훌륭한 문화재의 보호가 되는 것이다.
이번 대한문의 경우는 두 가지의 교리를 얻은 셈이다. 행정우선이 빚은 터무니없는 낭비와 문화재 보호역정-.
제2의 대한문이 다시는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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