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선물 줬더니 더 화내는 아내 때문에 황당하다는 남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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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전 30대 중반 샐러리맨입니다. 회식이나 워크숍 등 모임이 있으면 분위기 띄우는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자가발전 이벤티스트’ 입니다. 당연히 청혼도 드라마처럼 멋진 이벤트를 했죠. 최근 아내와의 갈등 때문에 고민입니다. 아내가 세 살 먹은 딸이 더 크기 전에 유학을 2년 다녀 오겠다고 하더군요. 갑작스러운 생이별 통보에 황당해서 며칠간 대화도 안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슬그머니 미안해져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아내 몰래 처가집 가서 장인 장모 식사를 직접 차려드리고, 비자금 털어 아내가 갖고 싶어하던 명품백도 깜짝 선물로 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화를 더 내는 겁니다. “언제 이런 거 하라 했느냐”면서요. 섭섭한 마음에 화가 나서 더 크게 싸웠습니다. 이혼 생각까지 들더군요.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A 선물로 누군가를 만족시킨다는 게 의외로 어렵습니다. 큰 돈 썼는데 상대 반응이 시원찮으면 당황스럽기도 하고요. 돈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참 머쓱합니다. 몇 번 실패하고 나면 그냥 상품권을 사게 됩니다. 사실 편의성만 따지면 현금이 제일 낫습니다. 그런데 돈은 선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나 봅니다. 현금보다 불편한데도 다들 상품권을 선물하는 걸 보면요. 물론 현금이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겠죠. 선물의 가치는 꼭 그 가격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비이성적 요소의 영향을 24시간 내내 받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감성마케팅 시대입니다. 감성적인 요소를 살짝 얹어야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비행기는 빠르고 안전하게 가는 게 핵심가치인데 사람들은 탑승 항공사를 정할 때 승무원의 친절한 서비스 등을 중요하게 따집니다. 그렇다 보니 친절에 제일 무관심했던 병원도 지금은 서비스 경쟁 중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고객을 위해 인테리어를 고치는 비용으로 차라리 최신 의료 장비를 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병원은 친절을 파는 곳이 아니라 병을 고치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고객 감성을 건드려 주지 않으면 다른 게 아무리 훌륭해도 외면당합니다.

 하물며 선물은 어떻겠습니까.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감성적 요소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나름 훌륭한 기획과 값비싼 명품도 실패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저는 ‘돈으로 사랑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표현할 수는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사랑을 얻고 그래서 둘 사이에 이미 채널이 형성됐다면 그 다음 전달하는 선물이 비쌀수록 나쁠 리 없습니다. 문제는 마음을 돈으로 사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는 겁니다. 돈의 힘, 그리고 물량 공세로 마음을 얻겠다며 “돈 들여서 네 마음을 샀으니 그 보답으로 나에게 진정한 사랑을 달라”고 요구하는 거죠.

 기계적 친절이 싫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기계인양 친절 서비스를 하는데 그게 싫다고 아우성입니다. 진짜 사랑을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회사는 직원들에게 고객을 진심으로 대하라고 친절 교육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돈만 준다고 펑펑 쏟아져 나오지 않습니다. 돈의 요구로 나올 수 있는 최상의 감성은 기계적 수준입니다. 진짜는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감성 마케팅은 긍정적 역할도 했지만 거꾸로 진짜 친절과 진짜 사랑에 대한 소비자 욕구를 증가시켜 버렸습니다. 전에는 물건 살 때 직원이 살짝 웃기만 해도 그 친절에 엄청 고마워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자동차 회사가 차량 구매자에게 불편함이 없는지 묻는 전화 한 통에 감동했죠. 그러나 그런 서비스가 일반화한 지금은 피곤하기만 합니다. ‘왜 전화까지 해서 귀찮게 하나’란 생각마저 듭니다. 내성이 생긴 겁니다.

 ‘진짜 친절에 대한 수요’와 ‘사람이 진심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친절의 공급량’ 사이에 심한 불균형이 생긴 게 최근 감성노동에 대한 스트레스가 늘어난 주된 원인입니다. 단골 고객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는 것과 진심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친절 마케팅에 물들다 보니 어느 순간 돈으로 사랑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직원이 불친절하다며 막말을 하며 화 내는 고객은 사실 스스로에게 좌절하고 있는 겁니다. ‘왜 나는 돈으로 네 마음을 살 수 없느냐’고 말이죠. 친절중독의 금단증상으로 우울과 분노를 보이는 것입니다.

 선물은 상호 작용입니다. 내 마음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 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서로 마음이 통할 때 진짜 친절, 진짜 사랑의 반응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사연 주신 분의 아내는 자기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은 남편에게 섭섭한 상황입니다. 아마 마음의 소통 채널이 단절됐다고 느꼈을 겁니다. 대화 단절은 남편 스스로 택한 행동이지만 남편은 미안함뿐만 아니라 불안감이 들었을 겁니다. 그 불안감만큼 최고의 이벤트와 깜짝 선물을 준비한 거죠. 그러나 아내 입장에선 화내고 속상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마저 빼앗긴 느낌이 듭니다. 받으면 고작 선물에 넘어가는 한심한 인간이 되고, 거절하면 나쁜 여자가 돼 버리기 때문이죠.

 남자들의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여자는 깜짝 선물에 약하다는 거죠. 관계가 좋을 때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 위험 천만한 기획입니다. 여자는 예상 못한 이벤트라 감동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읽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읽었기에 감동하는 겁니다. 청혼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데 깜짝 청혼을 하니 감동하는 것이지 결혼 생각도 없는데 이벤트랍시고 하면 깜짝 놀라 멀리 도망가 버립니다.

 아내에게 ‘유학 다녀 오라’고 마음을 먼저 선물하세요. 그리고 거절당한 명품백도 슬며시 다시 건네 주세요. 사람 마음은 복잡합니다. 막상 유학 승낙을 받으면 아내는 ‘정말 내가 가도 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도 가야 한다고 결심한다면 남편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마음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만약 “다시 생각해보니 안 가는 게 좋겠다”라고 하면 한순간 이해심 많은 남편이 되는 겁니다. 간다고 해도 아내로부터 미안함과 고마움이란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yoon.snu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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