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억류 전우들 자유 누릴 수 있게 더 많은 관심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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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국군포로 조기성(78·가명)씨가 경기도의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신변 안전을 고려해 가명을 사용했고 얼굴도 옆모습만 공개했다. [장세정 기자]

16세에 입대해 1951년 한국전쟁 중에 포로가 된 뒤 50년간 북한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2001년 탈북한 국군포로 조기성(78·가명)씨. 오는 27일 정전 60주년을 앞두고 그는 경기도 자택에서 기자와 만나 “아직도 많은 국군포로가 북한 땅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내 전우들이 하루 빨리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정부와 각계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국군포로 문제가 잊혀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군 7사단 산하 수색소대 소속 일병이던 그는 1951년 12월 새벽 강원도 회양군(양구군의 북측 지명) 문등리 계곡에서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분대장 이종욱 이등상사, 임승재 일병 등과 함께 분대원 3명이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조씨는 한동안 이 상사, 임 일병과 함께 포로수용소와 탄광으로 옮겨 다녔지만 53년 9월 평안북도 신창탄광에서 이들과 헤어졌다. 2001년 탈북에 성공한 조씨는 국방부에 전우들의 귀환 여부를 문의했지만 명단에서 둘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조씨는 헤어진 전우를 비롯해 여러 곳의 탄광에서 만난 수많은 국군포로의 강제노동 실상도 물망초재단(이사장 박선영 전 국회의원)에 알렸다. 남한 출신 포로라는 이유로 천대받았고 말 한마디 잘못 하면 총살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 국군포로의 아들은 아버지가 국군포로라는 이유 때문에 군 입대 자격이 박탈당하자 아버지에게 주먹질을 했고 충격을 받은 국군포로가 목을 매 자살하는 비극도 있었다고 조씨는 전했다.

 정치적 차별보다 더한 고통은 굶주림이었다고 조씨는 말했다. 그는 “50년간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참 많이 굶었다. 고난의 행군 때(1994~98년)는 일주일을 내리 굶기도 했다. 굶는 고통만큼 견디기 힘든 것도 없다”고 했다.

 북한에서 같이 지냈거나 만났던 대부분의 국군포로는 “죽더라도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서 죽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고 조씨는 회고했다. 조씨 또한 그런 마음으로 2001년 북한에서 맞이한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넘어, 그해 12월 전북의 고향 땅을 밟았다. 조씨처럼 국내에 생존하고 있는 탈북 국군포로는 모두 51명이다.

글, 사진=장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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