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시 읊으며 낯선 청중을 위로한 시인 고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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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모국어를 재료로 하는 문학이, 모국을 떠나서도 여전히 힘이 셀 수 있을까. 프랑스 낭트에서 고은(80) 시인이 시낭송회를 연다고 했을 때 들었던 의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답은 ‘가능하다’다. 현지 관객들은 먼 곳에서 온 시인이 토해내는 낯선 노래의 리듬에 빠져들었고, 이어지는 프랑스어 낭송에는 노래의 뜻에 골몰했다.

 이것은 ‘끝내 인간과 인간의 말을 떠나서 숨찬 자유’(시 ‘말에 대하여’)였고, ‘어린아이의 높은 목소리’(‘히말라야 이후’)였다. 고씨는 “언어 이전에 소리나 눈빛, 얼굴의 미묘한 표정이 모두 다 언어다. 그런 내 언어에 번역을 더해주면 듣는 이들의 심장이 그 모든 걸 아우르면서 가슴이 울렁거리고 뜨겁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28일 오후 8시 30분(현지시간) 프랑스 남서부 작은 도시 낭트의 국제교류센터인 코스모폴리스의 소강당. 프랑스 독자와 교포 등 70여 명이 모여들었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돼온 고은의 작품집은 그간 세계 25개 언어로 번역됐고, 프랑스에서도 『뭐냐』 『만인보』 등 시집 4권이 나왔다.

 고씨는 “낭트는 처음이지만 내 전생의 처음 다음으로 몇 번째 여정인지도 모르겠다”며 시공간을 한데 묶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했던 것, 울지 마라’(‘어떤 기쁨’)며 여러 세대 먼저 산 현자처럼 나직이 청중을 위로했고, 흐느끼듯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이수자인 이정주씨의 공연이 분위기를 돋웠다.

 베이루트에서 온 리타 바데나(32)는 “낭송을 들으니 전세계를 여행하는 듯, 전세계 인류의 감정을 이 자리에서 느끼고 경험한 듯했다”고 말했다. 프랑스어 낭송을 맡은 연극배우 멩동 로랑은 “시인에게서 에너지를 많이 받았다. 말을 많이 쓰지 않고도 삶과 사랑의 느낌을 전하고, 한 점의 풍경화를 보여주듯 감정을 고조시키는 힘이 있었다”고 했다.

 이날 행사는 작지만 의미 있는 시작이었다. 제1회 낭트 ‘한국의 봄’ 축제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권영빈) ‘한국예술특집행사’의 일환이었다. 다음달 16일까지 국악 공연, 한국 미술 전시 등이 열린다.

 고 시인은 3월부터 이탈리아 카포스카리 대학 초청으로 베네치아에 머물며 이 대학 ‘명예 펠로(Fellow)’로 임명돼 한국 문화를 강연했다. 이달 초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 아시아 시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했고, 다음달 1일에는 이탈리아 3대 극장 중 하나로 꼽히는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시낭송회도 연다.

 그는 “베네치아에 온 뒤로 100편 정도 시를 썼다. 시집 한 두 권 남기고 죽은 선배도 많았다. ‘우리 시사(詩史)의 가난을 네가 보충하라’는 책무를 주신 듯하다. 나는 더 써야 한다. 이것이 내 존재 이유니까”라고 말했다. 31일 시작되는 제5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낭트(프랑스)=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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