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의 프랑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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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영국에 망명하고있던「드골」이 1943년5월「런던」을 떠날때의 일이다. 『당신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냐?』고「이든」이 물었다. 『나는 당신네국민은 매우 존중할만하지만 당신네 정치도 그렇다고 말할수는없읍니다.』고「드골」이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동안 우리의 다른 우방들보다도 더 많은 두통거리였다는것을압니까?』잠시후에「이든」이 다시 물었다. 『그건 당연하겠지요. 「프랑스」는 위대한 나라이니까요』-이렇게 「드골」은 서슴지않고 받아넘겼다.
이것은 콧대가 센「드골」의 면모를 보여주는 유명한「에피소드」다. 그런「드골」이「루마니아」공식방문을 단축하고 귀국한 이제 혁명전야를 방불케하는「프랑스」의 질서도 곧 회복될 것이라고 보는 관측통도 많다.
실제로『개혁에는 찬성이나 「카니벌」(사육제적 난동)은 용납치 않겠다』고 단호한 태도를보인 가운데 전차대와 외인부대 및 공정부대들이 「파리」주변에 집결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이런 「힘에는 힘으로」식인 사고만으로는「프랑스」의 오늘의 병은 아물것같지 않다.
전국적으로 파급된 공장·교통·통신의 파업들은 혹은 손쉽게풀릴수있을지 모른다. 경찰에서까지내무상에게 즉각적인 봉급인상을요구하고있는지금 「드골」에게충성적인것은 일부 군대와 해병대뿐인것같지만 이런것도 그리큰 문제는 아니다. 보다 더큰 문제는「드골」자신의 문제의식에있다.
그는「루마니아」 방문때 「프랑스」는 「루마니아」와 달리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할때 틀별히 시험을 치르지 않기때문에 대학생으로서의 신분을 지킬줄 모르는학생들이 입학하여 소란을 피우게된다고 말했다한다.
이번 사태를 학생들의「카니벌]이라고평한 그의말에서도 그가 얼마나 위험한색안경을쓰고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미 사태는「스튜던트·파워」의 손을 떠나 반 「드골」정치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앞으로의 걱정은 설사「드골」이실각케된다하더라도 그후의혼란을 수습할만한 지도자나 강력한 단일세력이 지금의 「프랑스」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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