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숨결 어린 수원화성을 빛내는 고마운 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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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기면서 수원 화성의 축성을 결심했다. 수원 화성은 6·25전쟁으로 크게 소실됐다가 1975년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사진은 화성의 북문 `장안문`.

성곽을 타고 내려오는 싱그러운 봄바람에서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둘레 5.7km, 면적 1.2㎢, 40여 개의 건물이 모인 조선후기의 계획도시 수원 화성(사적 제3호). 정조와 정약용의 열정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듯하다.

1794년(정조 18년) 1월, 정조는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수원화성 축성을 시작해 2년 8개월 후 완공했다. 거중기가 40근(24kg)의 힘으로 625배나 되는 2만5000근(15000kg)의 돌을 들어 올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백성이 부담해야 했던 공역 기간을 단축시켰다. 정조는 축성술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화성의 건설 과정을 손수 점검하고 결정했다.

 화성은 약 200여 년 동안 성곽과 시설물 일부가 무너졌다. 특히 6·25전쟁으로 크게 소실됐다가 1975년 보수·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화성의 사대문 중 팔달문은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성문만 남아 있다. 장안문은 1920년대 수원시 시가지계획사업으로 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1950년 6·25전쟁 때 폭격으로 누각이 소실됐다. 1978년 문루는 원래대로 복원됐다.

삼성전자 수원 디지털시티 소속 임직원들이 수원 화성행궁의 한 고택에서 창호지 교체 작업을 하고 있다.

 화성에는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고 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았다. 정부는 1996년 복원공사를 시작했고, 2003년 10월이 돼서야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수원 화성은 삼성전자 수원디지털시티 임직원이 지키고 있었다. 2005년 4월 문화재청과 ‘1사 1문화재’ 협약을 맺고, 평일·휴일 구분 없이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410여 명의 삼성전자 수원디지털시티 임직원들이 창호지 바르기, 환경 정화활동 등의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팔달산 동쪽 기슭의 화성행궁에서 만난 프린팅사업부 박형섭 수석은 “수원 화성 지킴이 활동을 한지 벌써 5년째”라고 했다. 박 수석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우리 유산을 지키고, 알릴 수 있는 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 매우 보람있다”면서 “수원 화성에 올 때마다 역사적, 문화적 가치의 소중함을 배우고 간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280여 명의 임직원 문화해설사가 2007년부터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외국어 문화해설 재능 나눔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수원 화성에 대한 사전교육을 받은 후 연간 30만명의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삼성 행궁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수원사회봉사단장인 한민호 전무는 “삼성전자의 수원 문화재 지킴이 활동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시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앞으로도 사명감을 갖고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은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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