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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난파와 파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홍난파선생이 「봉선화」를 작곡하신것이 1920년이시라니, 3·1독립운동이 터긴 이듬해 일이다. 3월1일에 스무날앞서 일본 동경유학생 6백여명이 들고일어났던「2·8독립선언」 때 스물한샅짜리 청년의몸으로 한몫 끼었다가잡혀가서 톡톡이 고생을 하신 모양이니,「봉선화」의 그애처로운 가락은 그때 유치장에서 우러나온 피맺힌 흐느낌일지도 모른다.
내가 난파선생을 처음 뵈은것은 1929년, 양정고보4학년때었다. 일본말 노래밖에 부를것이 없던 우리 어린이들에게 부를 노래를 장만해주기 위하여「조선동요 백곡집」을 착수하시면서 나를 찾으신 것이었다. 『애들노래는 지어서 무엇하느냐』 『바이얻리니스트로 체통이 깎이는 일이 아니냐』 -이런 업선여김을 당하시면서 유치원선생노릇할 여성들이 다니던 중앙보육학교학생들을 의하여 동요를 짓기시작하셨으니, 「낮에 나온반달」 「꿀돼지 「달맞이」「고향의 봄」 「휘마람」들은 다 그매 한목 지어내신 명곡들이었다.
노랫말도 그렇지마는, 불러줄 사람도없는 노래를 부지런히 지어낸다는것은 남이 보기에 밑지는 일이요, 어리석은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8·15해방과더불어 삼천리강산에 메아리졌을때, 불우한 작곡가의 선견지명에 묵묵히 눈물머금은웃음들을 지었던 것이다.
미국에 계실때, 홍사단노래를 지어주신것이 동티가나서 일본이 한창 독이 올랐을 1938년에 잡혀갇히신 석달동안에 골병이드셔서 3년뒤인 1941년8월30일에 마흔세살로 한많은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으니, 실로 「난파」 의 일생은「파난」많은 일생이었다.
친구와 후배들이 주머닛돈을 털어서 서울 남산기슭에 모신 「난파상」 받침돌에 새긴 글을 나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과연 인생은 짧아도, 조국과 예술과 우정은 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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