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딜레마에 빠진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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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새해 들어 경기 위축이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해 4분기부터 위축되기 시작한 내수가 올 들어 더욱 지지부진하다. 기업들의 투자도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이라크 전쟁 위기로 국제 유가가 치솟으면서 물가가 오르고 에너지 파동이 우려될 정도다. 1분기 경제성장률이 4%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경기침체에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한다.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준비 중이라고 예단(豫斷)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현 상황에선 거시경제 기조를 안정에서 부양으로 바꾸는 경기부양책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도 임기 내에 7% 성장을 달성하되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은 쓰지 않겠다고 입장을 정리했었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꺼낼 만한 카드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기껏해야 재정을 조기에 집행하는 정도다. 정부는 2001년 경기 침체 때 재정 조기 집행으로 꽤 재미를 봤다. 일단 올해 재정의 51.6%를 상반기에 집행할 계획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경기부양책이라고 할 수 있는 금리 인하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지난해 저금리를 유지하면서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가계대출이 늘고, 부동산 값이 치솟았다"며 "지금도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있는 상태여서 섣부른 금리 인하는 더 큰 부작용만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꺼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정권 교체다. 최근 소비.투자 위축의 원인을 따져보면 경제적 요인보다 새 정부 경제정책의 불확실성과 이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경제정책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헷갈리는데 기업이든 개인이든 돈을 쓰려고 하겠느냐"며 "경기부양책을 논하기에 앞서 정권 인수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불확실성을 그대로 놓아둔 채 돈을 푸는 식의 경기부양책을 써봤자 효과도 못보고 귀중한 실탄만 낭비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감기에 걸렸는데 위장약 처방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과천 관가에서는 새 정부가 출범하면 이런 불확실성으로 인한 공백이 상당 부분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그때까지 정부는 유가 대책 등 분야별 세부 대책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4일 전윤철 경제부총리 주재로 경제장관간담회를 열고 이라크 전쟁이 터지면 ▶금융▶에너지▶해외건설.항공▶수출.원자재 등 4개 분야별로 대책반을 운영하기로 했다. 田부총리는 "이라크 전쟁이 끝나면 경제상황이 다시 좋아질 것으로 전망돼 경기부양책은 논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올해 성장률 목표가 지난해보다 낮은 5%대인 점을 감안할 때 성장이 조금 주춤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며 "상반기에 5%대 초반, 하반기에 세계 경제가 살아나면서 5%대 후반 정도의 성장률을 기록하면 성공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이라크 전쟁으로 경제가 예상보다 더 나빠질 경우엔 경제정책 전반을 다시 살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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