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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일본 땅을 지배하고 나서 “침략 아니다”라고 한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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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한 직장인이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역 계단에 늘 구걸하는 거지가 앉아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거지에게 지폐를 적선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거지가 고개를 들더니 직장인에게 말했다. “선생님. 재작년엔 1만원짜리를 주시더니 작년엔 5000원짜리, 그리고 올해는 1000원짜리를 주시니 어떻게 된 겁니까.” 직장인이 대답했다. “사실 제가 그동안 장가를 가고 애까지 생기는 바람에….” 거지가 화난 표정으로 되쏘았다. “아니, 그럼 제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말입니까?”

 얼핏 맞는 말처럼 들린다. 주기적으로 받았으니 내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감히 내 돈으로 제 식구를 먹여 살려? 하는 반감이 생길 법도 하다. 하지만 원래 누구 돈인지 따지면 금방 답이 나온다. 이런 문답이 유머라면 모르되 실제로 재현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의도적으로 편리한 것만 취사선택하는 궤변(詭辯)의 폐단이다.

 1990년대 후반 도쿄 특파원 시절 자민당 국회의원 두 명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한 의원이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에서 자행된 강제징병에 대해 해명한 말을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엔 우리도 집에 아카가미(赤紙·징집영장)가 날아들면 속수무책으로 전장에 끌려갔답니다.” 식민지뿐 아니라 내지(일본 본토)의 일본인도 전쟁터에 끌려갔다, 그러니 딱히 차별한 게 아니다, 라는 의미였다. 과연 그럴까? 한국인과 일본 노인세대 사이의 크나큰 인식 차이를 실감했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싶은데 남이 알아주질 않으니 급한 마음에 궤변을 동원하게 된다. 요 며칠간 쏟아진 일본발(發) 발언들이 그렇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은 지난 2월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특사로 와서 남북전쟁에 대한 미국 남·북부의 시각차를 예로 들며 한·일도 서로 역사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다. 지난 23일엔 아베 신조 총리가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나 국제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해도 좋은 것 아닌가 싶다. 그건 국가와 국가의 관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상대주의 논리를 극대화한 말장난이다.

 그렇게 인식은 나라마다 다르고 침략도 없었다면, 시범 케이스로 쓰시마 섬을 한국이 35년쯤 지배하는 상상은 어떤가. 물론 형식적으로 병합조약을 체결해 적법성 시비를 최소화한다. 주민들에게 국어상용(國語常用)이라는 미명하에 한국어만 쓰게 하고, 남자는 한국군으로 징집하고, 어족자원을 한국이 다 가져가고, 반발하는 사람은 고문하고 사형시키고, 전 주민을 김씨·이씨 등 한국 이름으로 바꾸게 한다면? 그러고 나서 “침략하지 않았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라고 한다면 말이다.

글=노재현 기자
사진=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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