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하와이 거주 한인이 비행기 만들어 시험 비행 성공"

미주중앙

입력

김광명씨가 비행기를 만들어 비행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실은 신한민보 1913년 10월 17일자 지면.

1913년 미주 한인이 비행기를 만들어 비행 실험을 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이는 1903년 오빌·윌버 라이트 형제가 역사상 처음으로 동력비행기를 조종해 지속적인 비행에 성공한지 10년 만의 일이다.

이같은 사실은 미주에서 발행됐던 한글신문 신한민보가 1913년 10월 17일자 '비행기의 좋은 성적'이라는 기사에서 "하와이 마위와일룩구(지역 이름) 김광명씨가 비행기 제조를 연구해 우선 적은 비행기를 만들어 날려 보았으며 이번에 좋은 성적을 얻어 한 번 크게 시험할 계획이 있는데 자금이 넉넉하지 못해 아직 그 계획을 중지하고 자본을 모으고 있다"고 보도한 데 따른 것이다.

또 다른 한글신문인 국민보도 이보다 3주 전인 1913년 9월 27일 "와일루쿠(지역 이름)에 김광명씨는 지극히 작은 모양의 비행기를 만들어 날려보기를 시험해 마침내 좋은 성적을 얻었으나 넉넉한 자본금이 없는 고로 크게 시험하기를 아직 예비치 못한다"는 내용의 '비행기를 연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이 기록을 발견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이자 한국 공군 정책발전 자문위원인 한우성씨는 "두 언론이 '비행기 시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뉴스로 다뤘다는 점, '적은 비행기' '지극히 작은 모양'의 비행기라고 표현한 점으로 미뤄 김광명씨의 비행기는 소형 모형 비행기보다 충분히 크고, 실제 비행기 보다 훨씬 작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비행기 크기에 대한 기록이나 비행기 설계도, 실험 장면을 담은 사진, 김광명씨 사진 등이 없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언론이 언급했다는 점에서 장난감 비행기가 아닌 비행기라고 할 만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우성씨는 "두 언론이 '시험 성공'이라고 했기 때문에 비행기 크기만 확인된다면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지 불과 10년 만에 한국인, 미주 한인이 비행기를 제조하고 비행에 성공했다는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우성씨가 찾은 다른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김광명은 1909년 8월 14일 국민회 아리마누 지방회 임시회에 새로 가입했으며 국민회에 의손금 15센트를 기부했다. 이에 앞선 1909년 2월 29일 한일합병이 있을 것이라는 전보를 받고 김광명 10전 등 미주 한인들이 의연금을 모았다. 또 1918년 도산 안창호를 대신해 미국·멕시코 지역 항일 독립운동 사령탑을 맡은 백일규 선생의 하와이 내왕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포들이 돈을 걷었는데 김광명이 50전을 기부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김광명은 한인 기숙학교 소2년급 학생으로 1914년 하와이 한인중앙학원을 졸업했으며 1916년 하와이를 떠나 4월 학생 신분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30년 뒤인 1947년 하와이 병원에 있는 김광명을 위해 동포들이 15달러50센트를 기부했다.

한우성씨는 "김광명의 비행기 제조와 그 후 행보는 1920년 미주 한인들이 북가주 윌로우스에 세웠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독립전쟁과 국권회복이라는 시대정신을 앞서고 있는 것"이라며 "확인만 된다면 미주 한인이 한국의 비행기와 공군의 역사, 독립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한편 한우성씨는 김광명씨 후손 등 당시 비행기 제조 및 비행 실험이나 김광명씨의 행보 및 업적에 대해 알고 있는 한인들의 제보(wshan416@stanford.edu)를 기다리고 있다.

이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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