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찬란함을 보라, 한국인의 손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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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위에 봉황이 올려진 이 뚜껑은 현존 유일의 고려시대 은제 주자(주전자)의 윗부분이다. 보스턴미술관 소장품. 두껍게 녹이 슬어 청동제로 오인됐다가 보존 처리 후 은제임이 밝혀졌다. [사진 삼성미술관 리움]

경주 서봉총(瑞鳳塚)에 잠들어 있는 신라 여인은 머리에 곱은옥(曲玉)과 달개를 가득 장식한 금관(보물 제339호)을 쓰고 있었다. 귀에는 굵은 고리 귀걸이를 걸었으며, 허리춤엔 여러 형태의 드리개(매달아 늘어뜨리는 장식)를 드리운 황금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1500여 년 전 온몸을 황금으로 감싼 채 매장된 이 여인은 신라의 왕족이었다. 당시 왕과 왕족은 황금으로 일상을 신성하게 만들었다. 집과 의복뿐 아니라 식기도 황금으로 된 것을 썼다. 마침내 이승에서의 운명이 다한 날, 장례식장에서 그들은 황금으로 망자의 온몸을 찬란하게 감싸 백성과 신하들에게 망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서봉총 여인의 여러 위세품(威勢品·정치적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 중 가장 빛나는 것은 금관이다. 일상에서는 쓰지 못했을 강도의 이 금관은 둥근 관테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과 2개의 사슴뿔 모양 세움장식을 못으로 고정한 형태다. 세움장식의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해 상서로움을 나타냈고, 관테 안쪽 금판의 꼭대기엔 세 가닥 나뭇가지 모양과 함께 봉황을 장식했다. 봉황 장식은 다른 금관에선 보기 드문 형태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서봉총 금관은 28일부터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볼 수 있다. 가야 금관(국보 138호)과 나란히 전시됐다. 금과 은, 보석으로 만든 전통 공예품을 선보이는 ‘금은보화(金銀寶貨): 한국 전통공예의 미’전이다. 전시장 첫머리서 만나는 현존 유일의 고려시대 은제도금 주자(注子)와 승반(承盤)을 비롯해 65점의 한국 전통공예품을 만날 수 있다.

은제도금 주자 및 승반(承盤·접시). 12세기. 주자(오른쪽) 총 높이 34.3㎝. 승반 높이 16.8㎝.

 이 가운데는 미국 보스턴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등 국내외 주요 박물관 소장품, 국보 9점과 보물 14점이 있다. 기원전 1세기 낙랑의 은제 마구(馬具)와 수정·마노 장신구부터, 스러져 가는 제국의 비운을 감추려는 듯 더욱 화려해진 대한제국기 장신구에 이른다.

 전시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한국미는 소백한 여백의 미’라는 편견을 버리라는 것이다. 우아함과 화려함을 자랑하는 금속공예 또한 한국미의 당당한 부분이다. 미술관은 이를 위해 전시 연출에도 공을 들였다. 어두운 전시장, 검은 진열장 속에서 오로지 장신구들만이 빛을 낸다. 종교와 미술이 만난 코너 ‘불법의 빛, 장엄의 미’는 석굴암을 닮은 공간에 불상들을 모셨다. 또한 갤럭시 노트2 등 인터랙티브 장비를 통해 36∼72컷 고화질 사진을 회전시켜 전시품의 세부를 볼 수 있게 했다.

영친왕비 봉황장식 옥비녀. 20세기 초. 옥·은에 도금, 산호·유리. 길이 20.3∼24.9㎝, 국립고궁박물관.

 손바닥보다 작은 불상, 장신구 안에서 빛나는 것은 한국공예의 찬란했던 시절을 만든 이름 모를 장인들이다. 손톱만한 유리 구슬 안에 들어 있는 서역인의 초상이 신라의 국제화를 보여주듯, 육안으로 알아보기도 어려운 부분까지 신경 쓴 그들이 귀걸이에, 불상에, 주전자에 담은 것은 하나의 세계이며, 꿈이었다. 최고의 재료로 최상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겠다는 장인들의 꿈 말이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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