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판팅위 뒷심 … 박정환, 응씨배 아깝게 놓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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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환 9단(오른쪽)에게 ‘상하이의 10일’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농심배 우승으로 영웅이 됐으나 그 직후 판팅위(왼쪽)에게 응씨배를 내주며 쓰라린 패배를 맛봤다. [사진 한국기원]

아쉬운 패배였다. 박정환 9단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고 믿었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판팅위 3단의 역전타가 잇따라 터져나왔다. 그 수들은 겉보기엔 작고 평범했으나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선명하게 승부를 갈랐다. 스코어는 3대1. 제7회 응씨배는 중국의 17세 소년기사 판팅위에게 넘어갔다.

 박정환은 지난 열흘 동안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봤다. 지난 주만 해도 바둑판은 온통 박정환의 세상이었다. 상하이의 1차 대첩인 농심배에서 그는 한국팀 주장으로 나가 깨끗한 마무리로 한국에 우승컵을 선사했다. 셰허 9단과 장웨이제 9단을 연파하며 중국 바둑에 박정환이란 이름 석자를 각인시켰다. 한국에 이세돌 9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20세가 된 박정환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 중국은 고개를 숙였다. 한국은 이창호가 만든 농심배 전설을 박정환이 이어가는 모습에 열광했다.

 1일 농심배를 따낸 박정환은 주말 이틀을 호텔에서 쉬고 4일 상하이 응씨기금회 빌딩으로 향했다. 상하이의 2차 대첩인 응씨배 결승전이 이곳에서 속개될 참이었다. 대국장은 물론 기자들과 프로기사들이 모이는 검토실도 숙연한 분위기였다. 2국까지 스코어는 1대1로 팽팽했지만 지금의 기세로 볼 때 판팅위가 박정환을 이기기는 버거울 것이란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3국은 예상을 뒤엎고 백을 쥔 판팅위의 일방 독주로 끝났다(178수 백 불계승).

 판팅위는 두터운 수비형 기사다. 타개에 능하고 종반에 강하다. 박정환은 수읽기에 능한 전천후 플레이어다. 그 역시 공격보다는 수비에 강하다. 어찌 보면 비슷한 기풍이라 둘의 바둑은 전투보다는 강인한 넝쿨처럼 서로 얽혀 든다. 덤이 8점(한국식으로는 7집 반)이나 되는 응씨배에서 3국까지 ‘백번 필승’이 나타난 이유다. 박정환이 백을 쥔 6일의 4국도 비슷한 흐름이었다. 덤 8점의 여유를 바탕으로 순조롭게 국세를 리드한 박정환은 누가 봐도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판팅위의 막판 수읽기가 흐름을 일거에 뒤집었다. 박정환 쪽의 미세한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판팅위의 수들이 허점을 제대로 찔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박정환은 제한시간 3시간30분을 넘겨 4점의 벌점까지 받은 끝에(판팅위도 벌점 2점) 5점을 졌다. 스코어는 3대 1. 판팅위가 응씨배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창호 9단의 최연소 기록은 한 달 차이로 깨지 못했다. 75년 7월생인 이창호는 1992년 1월, 16세6개월 만에 세계대회에서 우승했고 96년 8월생인 판팅위는 16세7개월 만에 우승했다. 우승상금은 40만 달러, 준우승은 10만 달러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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