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어떻게 나의 인생을 바꾸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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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 내가 공부하던 교실은 학교 도서실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칠판과 출입문이 달려 있는 한쪽 벽을 제외하곤 모두 책으로 둘러싸여 있던 교실에서, 나는 반 아이들과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예닐곱 개의 네모난 탁자 주위에 빙 둘러 앉아 얼굴을 마주보며 공부했다.

방과 후에 우리들에겐 다른 반 아이들이 하는 교실 청소 말고도 하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꼬마 사서’가 되어 담임 선생님과 함께 책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거나 겉표지를 닦고, 새로 들어온 책들을 정리하고, 대출장부를 살피는 일이었다. 마음에 맞는 몇몇 아이들과는 독서클럽이라는 것도 만들었던 것 같다. 얼마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 시절은 책과 함께 했던 가장 유쾌한 시간이었다.

책벌레 소녀의 아련한 기억 속에 담긴 책 이야기
사람들은 누구나 책과 관련한 자신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책과 함께 명멸한 기억의 불빛들 말이다.

『독서가 어떻게 나의 인생을 바꾸었나?』는 바로 책에 묻어 있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 책과 사람, 책과 삶, 그리고 책의 운명이라는, 책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킨다.

미국의 칼럼니스트이자 소설가인 애너 퀸들런은 1백 쪽 분량의 짧은 이 책에서 ‘작가’가 아닌 ‘독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낸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소설가답게 자신이 섭렵한 수많은 영미소설과 문학작품들을 언급한다. 하지만 지은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본격적인 문학론이나 작품들의 서평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만큼 소중했던 책들이 전해준 기쁨과 슬픔, 그리고 아쉬움들을 토로하고자 한다. 책벌레라고 불릴 만큼 책을 좋아했던 한 소녀가 책읽기라는 취미를 통해 쌓았던, 책장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독서의 추억과 경험들을 말이다.

지은이가 자신의 이런 자잘한 경험들을 얘기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얘기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책과 독서의 운명에 관한 좀더 본질적인 얘기들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책의 운명은 사람들이 왜 책을 읽느냐 하는 질문과도 관련된다. 디지털 시대에도 책의 운명은 비관적이지 않는데, 그것은 ‘책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독서행위의 독특함 때문이다.

그녀는 “우월감이나 발전을 위해, 심지어 배우기 위해 책을 읽지 않았다. 이 지상에서 그 어떤 행위보다 책읽기를 사랑했기 때문에(22쪽)” 책을 읽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마치 어린 시절 내가 학교 도서실에 꽂힌 책을 보면서 느낀 행복과 비슷한 것이다. 어떤 교양이나 정보, 혹은 출세를 위해서 책을 읽지 않았다는 말은, 책이라는 물건이 주는 특유의 묵직함, 종이를 넘길 때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백지 위에 일정한 질서로 배열된 검은 색 기호들에 매료됐을 ‘책벌레’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책이라는 물건 자체가 지닌 특유의 묵직한 매력
이런 맥락에서 지은이는 ‘올바른 독서방법’과 ‘잘못된 독서방법’을 가르는 식의 구분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나아가 독서의 기능이 사회가 허용하는 한계치 내에서 순기능적으로만, 예를 들면 기성의 도덕적 가치를 드높이는 방향으로만 작동해야만 하는 것에도 반대한다. 책은 개인적이며 정치적이고 동시에 재미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이 쉽게 퇴출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책이 가지고 있는 물질성에 의해서도 옹호된다. 지은이가 보기에 사람들이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서만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책 안에 있는 내용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라는 물건 그 자체, 다시 말해 4세기 전 최초로 모양이 갖춰진 오래되고 친숙한 형태에 집착(105쪽)”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책은 그 존재 조건의 무수한 변화를 겪을 것이다. 하지만 책이라는 인간의 독특한 창조물을 기억하는 수많은 독자들이 있는 한 책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가 어릴 적 안락의자에 대자로 다리를 뻗고 앉아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 느꼈던 행복이란, 아마도 내가 곧잘 따뜻한 방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끼고 이리저리 뒹구는 맛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책들은 아직도 우리의 머리맡에 펼쳐져 있다.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박정철/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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