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 두 계단쯤 성숙한 남자 박정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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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 <호텔리어>에서 편하고 친근한 놈 영재를 마지막으로 연기한 날 그는 <신화> 촬영장으로 직행했다. 워낙 탐났던 배역이라 쉴 틈도 없이 바로 달려갔던 것. 그리고 이제 그는 ‘최태하’라는 강한 인물을 통해 카리스마와 연기자로서의 힘을 갖춘, 두 계단쯤은 성큼 올라선 정철이 되어 있다. ]

지금까지와 다른 색깔로 나를 칠하다
지금까지 한 역할은 편했어.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 근데 이번 역은 너무 달랐어. 내 모습은 최대한 깊숙이 숨겨두고, 전혀 다른 인물이 돼야 했으니까. 성공에 대한 집착을 가진, 극단적인 성격의 인물. 사랑하는 여자마저도 버릴 수밖에 없고 복수의 복수를 반복하는 인물이지.

보통 드라마에서의 역할은 어느 정도 일관성이 유지되는 데 비해 태하는 상황 전개점마다 변화해야만 했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성격도 뒤바뀌는 그를 연기하면서 말투나 성격 표현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에 대해 감을 잡았지.
막판엔 거의 사이코라 해도 좋을 만큼 극단적인 인물이 되어버리는 그를 표현하는 게 그만큼 재미도 있고 맛도 있지만, 정말 극도로 힘든 작업이었어.

내면의 아픔을 지닌 채 평생 슬픔을 안고 사는 불쌍한 사람 태하…. 고교 시절부터 마흔 살까지를 몰입에 몰입을 거듭하며 연기했던 인물 태하를 이제 떠나보내려 해. 이제 사흘쯤 후면….

나에게 자신감을 얻고 성숙하다
과도기는 끝났어. 이건 내 자신감이야. 주위에서도 이번 드라마를 계기로 내가 많이 올라섰다고 얘기해 줘. 배우 냄새가 난다고. 사실 이 드라마가 나가기 직전에는 놀라는 사람들도 많았지.

그러다가 한 3, 4회쯤 나가고 나니까 “정철이가 저렇게 강한 역을?” 하며 걱정하던 그 사람들로부터 서서히 인정해 주는 말들이 나왔어. 성공이지. 무겁고 강한 정철을 얼마든지 만들 자신이 있었던 나에게 ‘성숙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의 반응은 꿀맛 같았어.

회를 거듭하며 더 드라마 속으로 빠져들었지. 너무 독하게 매달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고생한 만큼 성숙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인물 속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빠져들 때의 행복, 그 느낌 알아? 연기하다가 상대 배역과 이상한 교감 같은 게 전기처럼 통하고 순간 멍해지면서 카메라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느낄 때, 정철이는 참 행복해.

배우를 배우다
이번에 확실하게 얻은 게 있어. 그전까지는 그저 나만 연기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거기에 한 가지가 더해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그건 바로 감정의 객관성이라는 거야.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감을 느끼게 하는 보편적인 감성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

내가 나에게만 빠져서 하는 연기보다는, 보는 이들을 생각하고, 객관적인 표현을 놓치지 않는 것이 더 큰 연기라는 것이지. 내 나이 스물여섯. 이제 그 보편적인 감성이라는 엄청난 숙제를 위해 더 많이 ‘사람 공부’를 해야겠지. 많은 사람들을 접해보고 그 느낌들을 익혀 나갈 거야.

메모도 하고, 따라다녀 보기도 하고, 예측해 보기도 하고, 그 모든 ‘사람 공부’ 속에서 인간 정철이 넓어지고 풍성해져가겠지.

두 번째로 배운 건 바로 여유와 자연스러움에 대한 거야. 내 친구가 그러더군, “정철아, 넌 연기를 못하지는 않아. 근데 왠지 너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무서워. 금방 부러져버릴 것 같기도 하고….”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더군. 잘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힘이 잔뜩 들어간 연기에 대한 충고지. 그런 부담스러움보다는 풀어줄 때 풀어주고, 힘을 뺄 때 빼는, 긴장과 여유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그런 연기를 위해 노력할 거야. 마냥 풀어져 그냥 씩 웃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편안한 웃음 속에 아주 많은 것들을 녹여낼 수 있는 연기 말이야.

나 지금 중대 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과 대학원생. 내후년쯤 대학원 마치면 군대를 다녀올 거고, 그 뒤에는 NYU(뉴욕 대학)에 가서 한 2~3년간 연기 실기를 공부하고 싶어. 현장에서 얻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10년쯤 후면 후배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

겨울 여행을 떠나다
이 책이 나올 때쯤이면 난 동해에 가 있을 거야. 지난 5개월간 미친 듯 빠져들었던 <신화>를 뒤로하고 콘크리트 건물, 교통체증으로 답답한 도심 거리, 종일 귓가를 괴롭히는 도시의 소음을 뒤로하고 겨울 바다로 떠나는 거지.

사실 지금의 나를 표현하면 ‘마지막 잎새 하나 달랑 남겨져 있는 앙상한 나무’라고 할 수 있어. 내 안의 에너지가 거의 소진된 느낌. 탈진한 것 같고 조금 공허하기도 하고. 그럴 때 난 마약처럼 동해를 찾곤 했어.

이번 5개월 동안에도 사실 두 번 동해에 다녀왔어. 여름이었지 아마. 새벽에 촬영 끝나고 반 졸다시피 차를 몰아 그곳에 도착해서는 담배 몇 개비, 맥주 몇 병 비우고 복잡했던 머리 속도 함께 비우고 돌아오는 그런 여행.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주문진 조금 위쪽인데(지명은 까먹었다) 바다에서 불과 30m쯤 떨어진 곳에 내가 찍어둔 숙소가 있어. 새벽에 파도 소리 들으며 푸르스름한 기운을 느끼며 스르르 잠들 때의 그 포근함을 지금도 기억해. 그래서 떠날 거야.

★10문 10답★

1 지금 최고의 관심사: 스노보드 장비 구입하는 것.

2 여행 가고 싶은 곳 :동해, 필리핀에 있다는 환상의 섬(원주민만 사는 아주 멋진 섬이라는데 이름은 생각나지 않음).

3 크리스마스 계획 :친한 친구들, 선배들과 조촐한 파티라도 열어야겠지.

4 첫눈 오면 하고 싶은 것 :스키장에서 멋지게 스노보드 탈 때 첫눈 왔으면 좋겠어.

5 지금까지 가장 기뻤을 때와 가장 슬펐을 때 :기뻤을 때는 요즘 이 작품 하면서. 연기자로서 많이 성숙한 느낌을 얻을 수 있었기에. 슬프다기보다 안쓰러울 때는 어머니가 새벽 3~4시에 일어나 걱정해 주시는데, 난 피곤해서 짜증을 낼 때. 속상하고 안쓰럽고 그렇지.

6 핸드폰 초기 화면과 벨소리 :영어 단어로 ‘Relax & Tension’. 긴장도 하고 여유도 갖자. 연기를 좀더 조화롭게 하자는 뜻에서. 벨소리는 <신화>에 나오는 메리 홉킨(Mary Hopkin)의 ‘Those Were The Days’.

7 좋아하는 것 세 가지 :혼자 하는 드라이브, 감동적인 영화 보는 것,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 읽는 것.

8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욕심쟁이다. 일 욕심, 연기 욕심, 사람 욕심의 삼박자.

9 술 취하면 나는? :잔다. 소주 한 병이면 취하고, 취하면 바로 자버리는데, 분위기 깬다고 욕도 좀 먹지.

10 이상형 여자 :적극적이고 나를 잘 이해해 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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