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파격적 타협안… 북한 대화 응할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월스트리트 저널이 14일 전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발언은 파격적이다. 제네바 합의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북.미 간에 새 협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 고위 인사가 북.미 간 새 틀의 필요성을 명확히 밝힌 것은 처음이다.

파월의 발언은 또한 북한을 겨냥한 미국 정부의 협상안의 성격도 띠고 있다. 북한 핵문제를 놓고 북.미 양측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북한의 반응을 떠보려는 색채가 없지 않다.

북한도 제네바 합의가 사문화됐다는 입장이고, 미국과 포괄적인 협정을 원해 왔다는 분석들이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놓고 미 행정부의 협의가 한창인 가운데 파월의 새 협정 체결 발언이 나온 것은 미국의 북한 핵문제 해법의 가닥이 잡혔을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파월의 발언은 또한 미국 행정부 내 강경파를 다독거리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국방부와 국무부 내 비확산 전문가, 공화당 의원들은 제네바 합의가 북한의 핵 개발을 봉쇄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파월 발언은 미 행정부 내의 조율을 거친 대북 협상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NPT를 탈퇴한 지 나흘 만에 나온 미 국무장관의 발언이 협상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파월의 이 같은 발언이 미 정부의 공식 입장일 경우 상당한 파장도 예상된다. 당장 대북 경수로 지원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북 경수로 지원 사업은 제네바 합의 가운데 유일하게 이행되고 있는 부분이다.

파월이 북한에 원자력 이외에 다른 에너지 제공이 가능하다고 밝힌 것은 "북한에 원전(경수로)을 지어주는 것은 핵 비확산 차원에서 곤란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풀이다.

미 행정부 내 매파들이 줄곧 경수로를 화력발전소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만큼 대안은 화력발전소 건설이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공정률 27%를 보이고 있는 경수로 1기 공사는 중지될 수 있고, 한국 정부의 반발이 점쳐진다.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파월이 밝힌 새 협정이 북.미 간 양자 협정인지, 아니면 다자간 협정인지는 불투명하다. 미국은 에너지 문제가 핵심 사안인 만큼 한국.일본.러시아.중국이 포함된 다자간 협정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협정에 중국과 러시아를 관여시키면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부담은 그만큼 줄어든다. 특히 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위해 다자 안보협의체 창설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온 데다 다량의 천연가스를 보유하고 있다.

파월의 이번 발언에 따라 일단 북.미 간 뉴욕채널 접촉이 시작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월이 북.미 간 새 협정 체결 외에 북한이 요구 중인 체제 보장과 관련해서도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면 문서 형태로 해줄 수 있다고 거듭 시사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선 미국 정부의 진의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대북 경수로 지원이 중단되는 데 대해 북한이 반발할 수도 있다. 북한은 미국과 에너지 협정이 아닌 원자력 협정 체결을 희망해온 데다 현재 확보하고 있는 원자력 전문인력의 활용을 위해서도 경수로를 선호할 것이다.

오영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