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한국 투자 보류·취소 조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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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 핵 이슈에 의해 제기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협력을 방해하는 반미 감정은 절대로 허용돼선 안된다. (Anti-US Sentiment must not be allowed to hinder cooperation to defuse tension sparked by the North Korean nuclear issue.)"

미국 재계가 오는 19일부터 미국 하와이에서 열릴 한.미 재계회의 운영위원회에 참석할 한국 재계측에 보내온 공동성명서 초안 중 일부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측은 성명서를 보내면서 운영위원회 회의 중에 한국측 관계자가 이런 내용으로 발표해 주기를 강력히 희망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측 사무국인 전경련 관계자와 주한 미국 기업인은 "성명서 관행상 매우 일방적이고 강경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반미 시위 등으로 한.미 관계가 흔들리는 조짐을 보이면서 두 나라 간 민간 경제계에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있다.

◇곤혹스러운 재계 입장=국내 재계는 미국측 재계 시각이 매우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룹 회장들로 구성된 전경련 회장단 등 재계 고위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반미 감정이 더이상 확산돼선 안되며, 국익에 큰 손해를 미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미국 재계의 반미 정서 확산에 대한 우려는 증폭돼 갔다.

운영위원회에 참석할 재계측 멤버들이 8일 오전 별도로 모인 것은 미국측의 이런 분위기에 대한 대응 방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조석래 위원장.손병두 전경련 부회장.김희용 동양물산 회장.조동만 한솔 회장 등 재계회의 멤버들과 게스트로 참석할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장 등이 이 모임에 참석했다. 참석 인사들은 "반미 정서가 더이상 확산돼선 안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지만 "미국측이 요구하는 대로 성명서가 나가서도 안된다"는 분위기가 대세였다고 한다.

◇반한(反韓) 감정, 심상치 않다=한 미국 기업인은 "9.11테러 이후 미국은 일반 국민은 물론 여론 주도층도 급속히 애국적이고 감정적으로 바뀌었다"며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미국측의 시각도 매우 냉랭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주한 미국 기업인들의 동요도 심상치 않다. 대다수 주한 미국 기업인들은 "반미 감정과 비즈니스는 별개의 문제며 반미 시위가 양국 간 경제협력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그러나 좀처럼 꺾일지 모르는 반미 감정 때문에 일각에선 "한국 내에서 비즈니스는 물론 신변안전 문제까지 위협받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을 내비치고 있다.

미국 기업인들은 특히 이번 반미 감정 표출이 양국간 비즈니스 협력 체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 기업의 한국 투자도 위축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내의 한 통신장비 회사 인수를 검토하던 미국의 L사는 최근 악화된 국내 투자 여건 때문에 투자를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프리 존스 전 주한 미상의 회장도 "올초 한국에 1천만달러 이상 규모의 투자를 계획했던 미국계 항공부품업체와 금융사가 최근 반미 감정과 북핵 문제 등을 이유로 투자를 보류하거나 취소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김영욱.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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