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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쫓겨난 마지막 황제, 일본 환대에 “천황 만세”
일본 육군대학 시절의 푸제(앞줄 왼쪽 두번째)와 룬치(왼쪽 첫번째). 앞날을 예측이라도 한듯, 표정이 심란해 보인다. 1943년 4월 23일 도쿄. [사진 김명호] 푸이(溥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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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200만 충돌 ‘중원대전’ 평정한 쑹메이링의 편지 한통
동북에서 러허(熱河)로 철수한 장쉐량(앞줄 흰 복장)을 방문한 쑹메이링의 오빠 쑹즈원(장쉐량 오른쪽). 1933년 2월. [사진 김명호]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결정적인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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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유런, 蔣 고향까지 쫓아가 “장쉐량 석방하라”
1928년 2월 2일, 난징에서 열린 국민당 4차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위유런(앞줄 왼쪽 여섯째)은 장징장(앞줄 의자에 앉은 사람), 차이위안페이(앞줄 오른쪽 셋째), 탄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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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5) 장제스
1926년 말부터 장제스는 국민당에 입당한 공산당원의 숙청[淸黨]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1927년 4월 1일,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지배하던 우한(武漢)의 국민정부는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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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상하이 계엄령 선포 뒤 공산당 소탕
1927년 12월 1일, 상하이에서 열린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식. 야인(野人) 장제스는 이 결혼식으로 다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사진 김명호] 1926년 말부터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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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6) 쑨원
▲“뜻이 있으면 이루고야 만다”(가운데 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오른쪽), “동지들은 여전히 노력해라”가 내걸린 쑨원의 빈소를 지키는 가족들. 오른쪽부터 손위 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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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펑위샹과 합작 위해 베이징行 도착 후 자리보전
“뜻이 있으면 이루고야 만다”(가운데 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오른쪽), “동지들은 여전히 노력해라”가 내걸린 쑨원의 빈소를 지키는 가족들. 오른쪽부터 손위 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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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56) 뭐 자랑할 일 남길 거라고
▲베이징정변의 주역 펑위샹(馮玉祥). 차오쿤을 총통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도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쑨원(孫文)을 베이징으로 영입했지만 쑨원이 도착한 지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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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자랑할 일 남길 거라고 … 내 사진 찍지 마라
베이징정변의 주역 펑위샹(馮玉祥). 차오쿤을 총통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도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쑨원(孫文)을 베이징으로 영입했지만 쑨원이 도착한 지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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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6·25전쟁 한국민에게 끼친 상처 사과해야”
2일 홍콩 금융가 센트럴을 찾은 홍콩 정치학자 데이비드 추이 박사. 그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비밀자료를 인용해 북한의 6·25 남침을 서술한 혐의로 11년간 옥고를 치르다 지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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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6·25전쟁 한국민에게 끼친 상처 사과해야”
2일 홍콩 금융가 센트럴을 찾은 홍콩 정치학자 데이비드 추이 박사. 그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비밀자료를 인용해 북한의 6·25 남침을 서술한 혐의로 11년간 옥고를 치르다 지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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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4) 마오
▲리다(李達·이달)는 1921년 7월 23일부터 열린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의 소집인이었다. 3년 후 탈당했지만 마오쩌둥과는 교감이 깊었다. 신중국 선포 후 재입당, 우한(武漢)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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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혁명이 별거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리다(李達·이달)는 1921년 7월 23일부터 열린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의 소집인이었다. 3년 후 탈당했지만 마오쩌둥과는 교감이 깊었다. 신중국 선포 후 재입당, 우한(武漢)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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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末~문혁은 삼국지보다 극적, 한국인 머릿속엔 공백”
중앙SUNDAY의 인기 연재물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가 200회를 넘었다. 혁명과 전란으로 점철된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알기 쉽게 풀어낸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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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末~문혁은 삼국지보다 극적, 한국인 머릿속엔 공백”
-연재를 시작할 때 200회를 넘기겠다는 생각이 있었나.“처음부터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을 때에는 국내에 잘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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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황제의 도시 베이징 (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는 베이징(北京), 약칭은 징(京)이다. 한자 경(京)의 본뜻은 인공으로 만든 언덕이다. 자연적인 언덕은 구(邱)다. 자연이 배제된 인공의 언덕이 수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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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87) 장제스, 소련 코민테른 간부와 아들 교환
▲시베리아 시절 중기계창 동료들과 야유회를 나온 장징궈(앞줄 좌6)와 부인 파이나(앞줄 좌5). 파이나는 중국에 온 뒤 시어머니로부터 장팡량(蔣方良)이라는 중국 이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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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소련 코민테른 간부와 아들 교환 제의 거절
시베리아 시절 중기계창 동료들과 야유회를 나온 장징궈(앞줄 좌6)와 부인 파이나(앞줄 좌5). 파이나는 중국에 온 뒤 시어머니로부터 장팡량(蔣方良)이라는 중국 이름을 받았다.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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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잊혀졌던 사상가
1935년 12월 9일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학생시위가 베이징에서 발생했다. 공산당 탈당 후 10년간 칭화대학 연구실과 집을 오가던 장선푸는 펑쩐, 야오이린 등 학생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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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푸 “전쟁에 필요한 것은 충성이 아니라 문화다”
칭화대학 철학과 교수 시절 두 딸과 함께 한 장선푸와 류칭양. 김명호 제공 1935년 12월 9일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학생시위가 베이징에서 발생했다. 공산당 탈당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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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준걸열전] ‘당대의 와룡선생’ 양융타이
“선제(先帝, 유비)께서 창업하신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한 채 중도에서 붕어하셨다. 이제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益州, 지금의 쓰촨)는 피폐해졌으니 진실로 위급 존망의 때다(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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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우호단체 탐방①] 한중문화협회는
▶한중문화협회는 1942년 10월 11일 항일 독립운동 당시 수도인 충칭에서 최초로 창립됐다. 해방 후에는 1965년 12월 11일 당시 국가 원로, 항일운동가, 중국 상해임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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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우호단체 탐방①] 1942년 충칭서 설립된 한중문화협회를 찾아
1992년 국교 수립 이후 16년 동안 한중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뒤에는 국내 여러 민간단체들의 공이 컸다. 한중문화협회, 한중우호협회, 21세기 한중교류협회, 한중친선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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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루중린(鹿鍾麟)
▲루중린(오른쪽)이 두 번째 만난 푸이의 요청을 받고 항상 유념해야 할 것들을 적어 주고 있다. 김명호 제공 1924년 10월 21일 서북군 총사령관 펑위샹(馮玉祥)은 출정 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