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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6) 쑨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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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있으면 이루고야 만다”(가운데 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오른쪽), “동지들은 여전히 노력해라”가 내걸린 쑨원의 빈소를 지키는 가족들. 오른쪽부터 손위 동서 쿵샹시(孔祥熙), 처남 쑹즈원(宋子文),쑨원의 아들 쑨커(孫科), 사위 따이언싸이(戴恩賽). 쑹칭링(宋慶齡), 쑨즈핑(孫治平·쑨커의 장남), 쿵링이(孔令儀·쿵샹시 장녀), 쑨즈창(孫治强·쑨커의 차남), 쑹메이링(宋美齡), 쑹아이링(宋靄齡). 장제스(蔣介石)는 쑹메이링과 결혼 전이라 가족에 끼지 못했다. [사진 김명호]

1924년 9월 중순 봉천(奉天)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 병력 17만을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이동시켰다. 산하이관은 수도 베이징의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총통 차오쿤(曹琨·조곤)은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두 사람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 일대를 근거지로 한 직례(直隷)파의 영수 격이었다.
제2차 봉직전쟁(奉直戰爭)의 막이 올랐다. 25만 대군을 거느린 우페이푸는 산하이관과 러허(熱河)에서 장쭤린의 봉천군과 치고받았다. 베이징이 허술해진 틈을 같은 직례파 군벌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이 파고들었다. 10월 23일 심야에 병력을 몰고 회군한 펑위샹은 총통부를 포위하고, 차오쿤을 연금시켰다. 소문이 퍼지자 전선에 있던 우페이푸의 병력은 와해됐다. 우페이푸는 전쟁 할 맛이 안 났다. 초라하기가 패잔병보다 못한 병력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 뱃길을 이용해 후베이(湖北)성에 안착하자 정신이 돌아왔다.

정변에 성공한 펑위샹은 차오쿤을 총통직에서 퇴위시켰다. 자금성에 살며 외국 국가원수 예우를 받던 마지막 황제 푸이도 궁궐에서 내쫓았다. 군대 명칭도 국민군(國民軍)으로 바꿔버렸다. 펑위샹은 남쪽의 혁명세력을 대표하는 쑨원(孫文·손문)에게 전보를 보냈다. 내용이 밥상 기다리는 거지보다 더 절박했다. “국민들은 온갖 눈치 보며 생글거리기 잘하고, 말장난이나 일삼는 무리들에게 농락당하기 쉽다. 국가대계는 현명하고, 무모할 정도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야 한다. 나는 선생이야말로 민국의 창조자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열정과 기백을 전 국민이 추앙한 지 오래다. 빨리 북쪽으로 와서 우리를 어루만져주기 바란다.”

광저우(廣州)의 대원수부(大元帥府)에 있던 쑨원은 북행(北行)을 결심했다. “북방은 호랑이 굴이다. 장쭤린의 존재가 찜찜하다. 무슨 흉악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막는 사람이 많았다. 쑨원은 “나도 저들 못지않게 흉악한 사람”이라며 안심시켰다.부인 쑹칭링도 걱정이 태산 같았다. 정국이 워낙 복잡해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쑨원의 건강이 문제였다. 남편의 기력이 전만 못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남들에게 말했다간 속으로 너 때문이라고 흉 볼게 뻔했다. 가끔 통증을 호소했지만 주변에 그 정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11월 10일 쑨원이 북상선언(北上宣言)을 발표했다.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의 정치적 주장에 반대한다. 국민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중국의 통일과 건설을 도모하겠다.” 전국이 환호했다. 선언 3일 후 쑨원은 쑹칭링과 수행원 20명을 데리고 광저우를 떠났다.쑨원은 결혼한 날부터 가는 곳마다 쑹칭링을 데리고 다녔다. 전쟁에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오죽 심했으면 “전쟁터에 여자가 어른거리면 재수 없다. 병사들 사기에도 문제가 많다”며 만류하는 측근이 있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쑹칭링의 동행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누가 봐도 쑨원은 환자 티가 났다.

1925년 1월 1일, 베이징역에 도착한 쑨원을 10만 인파가 에워쌌다. 중도에 온갖 행사를 치른, 47일간의 여행은 쑨원을 중환자로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시국 논의는커녕 몸도 가누지 못했다. 3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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