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軍 200만 충돌 ‘중원대전’ 평정한 쑹메이링의 편지 한통

중앙선데이

입력 2014.06.29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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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호 33면

동북에서 러허(熱河)로 철수한 장쉐량(앞줄 흰 복장)을 방문한 쑹메이링의 오빠 쑹즈원(장쉐량 오른쪽). 1933년 2월. [사진 김명호]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결정적인 순간에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도왔고, 결정적인 순간에 장제스를 망쳤다. 두 사람 모두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80>

1928년 1월, 장제스는 혁명군 총사령관에 복직했다. 1개월 후, 국민당 정치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자 북벌을 서둘렀다. 지방군벌 펑위샹(馮玉祥·풍옥상), 옌시산(閻錫山·염석산), 리쭝런(李宗仁·이종인)과의 연합에도 성공했다. 북벌군은 연전연승, 베이징에 웅거하던 군벌정부의 마지막 통치자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근거지 동북(만주)으로 가던 도중 폭사했다. 베이징을 점령한 장제스는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과 함께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유해가 안치된 샹산(香山)의 사찰을 참배했다. 전세계의 신문 1면을 네 거두가 장식했다. 장쭤린을 계승한 동북의 새로운 실력자 장쉐량도 장제스의 중앙정부에 귀순했다. 장제스는 동북의 통치권을 장쉐량에게 일임했다.

국민정부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관을 겸한 장제스가 1인 독재를 강화하자 신 군벌을 대표하는 세 사람이 반발했다. 사사건건 장제스와 충돌했다. 광시(廣西)군벌 리쭝런이 20만 병력을 동원해 장제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세상이 복잡해질 징조였다.

장제스는 리쭝런과 펑위샹의 연합을 우려했다. 철도와 교량 폭파가 계속되자 펑위샹을 막후로 지목하고 전국에 체포령을 내렸다. 장제스와 호형호제하던 펑위샹은 일단 몸을 피했다. 촌구석과 산속을 전전하며 아령과 역기로 체력부터 다진 후, 평소 꼴도 보기 싫어하던 옌시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옌시산도 펑위샹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리쭝런과 연합해 장제스를 끌어내리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장쉐량이었다.

장쉐량은 고대 서화(書畵)에 관심이 많았다. 1931년 4월 29일 고궁박물원을 방문한 장쉐량(오른쪽). 왼쪽은 박물원 초대원장 이페이지(易培基). 이페이지는 청년시절 마오쩌둥의 스승이었다.
동북의 장쉐량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신 동북건설을 표방하고 군비 확장에 주력했다. 아버지 장쭤린 집권 시절, 한린춘(韓麟春·한린춘)이 상하이의 도박장에서 따온 돈으로 세운 선양병공창(瀋陽兵工廠)은 중국 최대 규모의 무기공장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대포와 장총의 양과 질은 전통을 자랑하는 한양병공창(漢陽兵工廠)의 제품을 능가했다.

1930년 4월, 제 갈 길을 갈 것 같던 세 사람의 동맹 소식이 전파를 탔다. “천하대란의 막이 올랐다”며 세계가 경악했다. 육해공군 47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북에 웅거한 장쉐량의 향방을 전세계가 주시했다.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았다.

1930년 4월, 200여 만 명이 동원된 마지막 군벌전쟁, 중원대전(中原大戰)의 막이 올랐다. 관건은 장쉐량이 누구 편을 드느냐였다. 장쉐량을 끌어들이기 위해 양측은 안간힘을 썼다. 기상천외한 조건들을 제시했지만, 효과는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의 간곡한 편지 한 통만 못했다.

사태를 관망하던 장쉐량이 장제스 지지를 선언하자 전국이 떠들썩했다. 동북군이 만리장성을 넘자 전쟁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리쭝런은 자신의 근거지 구이린(桂林)에 납작 엎드리고, 옌시산은 통치 구역인 산시(山西)성 밖을 나오지 않았다. 장제스는 펑위샹의 해외여행을 허락하며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때 모스크바에서는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첫사랑인 펑위샹의 딸과 동거 중이었다.

중원대전을 계기로 통치권을 공고히 한 장제스는 2인자 장쉐량을 후계자로 인정했다. 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육해공군 부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베이징 이북과 동북 전역의 전권을 장쉐량에게 내줬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좋아했다. 장쉐량이 위펑즈(于鳳至·우봉지)와 함께 난징에 오면 어딜 가나 데리고 다니며 의형제를 맺었다.

장제스와 장쉐량의 밀월은 여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하루는 쑹메이링을 만나고 온 위펑즈가 장쉐량에게 투덜댔다.

“동북에 있을 때 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사람들과 의형제 맺기를 좋아했다. 의형제가 100명도 넘는 것 같았다. 시아버지는 더했다. 내가 물었더니 8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의형제가 뭐냐고 물었더니 결국은 의형제 맺었다는 것들끼리 죽기 살기로 싸우는 법이라며 씩 웃었다. 시아버지 말이 맞는 것 같다. 난징에 와 보니 여자들도 보통이 아니다. 오늘 쑹메이링이 불쑥 의자매 맺자는 바람에 당황했다. 면전에서 싫다고 할 수도 없고, 곤혹스러웠다. 그러자고 했더니 나를 자기 엄마와 언니에게 데리고 갔다. 얼떨결에 의자매와 의엄마까지 생겼다. 그 여자 너무 정치적이다. 빨리 동북으로 가자. 오빠라는 사람도 만났다. 우리 부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사람과 가까이 해라. 쑹메이링은 남자를 이용할 줄 아는 여자다. 앞으로 조심해라.”

장쉐량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위펑즈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쑹메이링에게 장쉐량의 부인 대접을 받았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군이 장쉐량의 근거지 선양을 공격했다. 당시 국민당 고관들은 “우리는 일본의 적수가 못 된다”며 일본 공포증에 걸려 있었다. 장제스는 “일본군과 싸우면 중국의 연해지역은 3일 이내에 일본군에 함락된다”며 ‘3일 망국론’까지 폈다. 베이징에 있던 장쉐량에게 전문을 보내 “일본군과 충돌을 피하라”고 지시했다.

동북을 일본군에 내준 장쉐량은 청년원수에서 전 중국인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장제스의 지시였다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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