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886)골동품 비화 40년(27)|박병래(제자 박병래)

    그림을 모으다보면 이상한 종류의 것도 손에 걸리게된다. 즉 점잖은 산수나 인물뿐이 아니라 숨어서 볼 수밖에 없는 물건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아주 노골적으로 남녀가 놀아나는 그

    중앙일보

    1973.10.30 00:00

  • (885)골동품 비화 40년(26)|박병래(제자 박병래)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나는 원래 도자기에 곁들여 서화를 모았기 때문에 그리 많지는 못하였다. 아마 1백점 내외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데 1·4후퇴 때에 이 서화도 도자기와 함

    중앙일보

    1973.10.29 00:00

  • (884)골동품 비화 40년(25)|박병래(제자 박병래)

    누구나 고 미술품을 모으고 있는 동안에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서화의 수집을 시작한 이가 뒤에 도자기에 손을 댄다든지, 도자기를 모으는 동안에 목기도 갖게 된다든

    중앙일보

    1973.10.27 00:00

  • (874)골동품 비화40년(15)|박병래(제자 박병래)

    일제 때 고려청자병 한쌍이 경매장에 나온 일이 있었다. 경매장에서 중개인이 한 손에 병 하나씩을 쥐고 값을 부르다가 잘못해서 오른손에 든 것을 깨뜨렸다. 나중에 그것을 판상하려

    중앙일보

    1973.10.16 00:00

  • 전면미화…가로 정비

    서울시는 지난 13일 「가로환경정비 종합지침」을 마련, 오는 9월1일부터 10월말까지 폭25m이상의 가로 45개 등 96개 노선 2백44·8km의 가로변의 건물(불량점포와 일반불량

    중앙일보

    1973.08.17 00:00

  • (819)|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37)-박갑동>

    북한의 군사 정세는 이상 본 바와 같으나 1949년이라는 해는 김일성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바쁜 해였다고 볼 수 있겠다. 당시 북한은 그 나름대로 자체 안의 경제 상

    중앙일보

    1973.08.10 00:00

  • 열사의 공포와 악몽 88시간-기장·승객·기자가 말하는 JAL기 피납 체험기

    【동경 24일 AFP동양】피납 일본항공(JAL) 점보·제트여객기의 기장 고누마·겐지씨는 24일 리비아 벤가지 공항에서 JAL기 납치가 치밀한 계획아래 진행됐으며 암스테르담으로부터

    중앙일보

    1973.07.25 00:00

  • (4)「금관나라」의 수수께끼

    고분얘기가 나올 적마다 일반의 가장 큰 관심은 금붙이이고 그 중에도 특히 금관이다. 경주의 그 숱한 고분 중에는 천년의 왕업이 계승되는 동안 50여 군왕에 왕비까지 합하여 1백여

    중앙일보

    1973.06.12 00:00

  • 전적문화재의 현대적 관리

    한국도서관협회는 제9회 도서관주간 기념강연회를 14일 하오 2시 서울 시립 종로도서관에서 열었다. 다음은 임창순씨(문화재위원)의 「전적문화재의 현대적 관리」를 요약한 것이다. 전적

    중앙일보

    1973.04.17 00:00

  • (5)|홍재휴 교수(대구교대) 교주|제자의 뒷배경 글씨는 『임진록』 원본의 일부(7)

    판관실내의 애걸하는 말에 예(왜)도 매우 불쌍하게 여겼던지 오래 서서 지껄이더니 웃으며 흩어져 갔다. 그때 이진사가 손에 들었던 활을 재빨리 놓았기 망정이지 만약 활을 예에게 보이

    중앙일보

    1973.03.13 00:00

  • (6)|홍재휴 교수(대구교대)교주|제자의 뒷 배경 글씨는 임진록 원본의 일부

    길잡이 김권농이 못 가겠다고 하는 이유는 소가 병들었다고 탈잡는 것이었다. 이진사는 한수에게 소리쳤다. 『네가 길을 알리라.』 일행은 한수를 앞세우고 다시 떠났다. 그때는 6월27

    중앙일보

    1973.03.12 00:00

  • (669)제30화 서북청년회(29)

    솔직이 고백해서 학력증명서 발급사무는 뒤죽박죽이었다. 우선 문서(용지)꼴이 말씀이 아니었다. 등사가 제대로 안돼 희미한 것은 그만두고 세벌네벌 그려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드는

    중앙일보

    1973.01.27 00:00

  • (2)광양 은장도

    은장도는 옛 여인의 정절도. 작은 칼날의 서릿발에 숱한 한국여인의 애화를 담아왔다. 옛날엔 으레 시집가는 딸에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친정 어머니가 가만히 옷

    중앙일보

    1972.11.29 00:00

  • (4)고남 전기의 계산포무도

    완당 김정희 선생은 고남에게 써준 봉련 글씨 속에서 『그림은 마곡의 새 법을 보였는데 시는 석범의 옛 가락이로구나, 고남의 시와 그림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답기로 이 글귀를 주노라』

    중앙일보

    1972.11.23 00:00

  • 실학연구에 획기적 전기|정다산의 미소개 저서 10종 발견을 계기로

    조선조의 대표적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l836년)의 알려지지 않았던 저작들이 최근 대량으로 발견됨으로써 실학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혀 학계에 소

    중앙일보

    1972.09.07 00:00

  • 「돌아오지 않는 다리」건너 돌아와|한적 대표일행 4박5일 일정 마치고

    【판문점=대한민국 신문·통신취재단】『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또 오십시오』-남북적십자 본 회담 한적 측 대표 등 일행54명은 2일 상오

    중앙일보

    1972.09.02 00:00

  • 「단절」을 말해주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풍경|본사 이광표 특파원, 27년만에 본 북의 산하

    【평양=대한민국 신문·통신 공동취재단】29일 하오 2시25분 단절 27년만에 평양 땅을 밟았다. 판문점에서 평양까지 2백21km. 자동차로 3시간55분이 걸리는 지척-. 4반세기동

    중앙일보

    1972.08.30 00:00

  • 새로 발견된 「최고목조」 봉정사 극락전|고려 공민왕 12년 1363년 중수

    우리 나라의 가장 오래된 건물양식으로 주목돼오는 안동군 서후면 태장동 소재의 국보15호 봉정사 극락전의 해체도중 중수상량문이 발견돼, 고려말 공민왕 12년 1363년에 중수했다는

    중앙일보

    1972.08.22 00:00

  • (489)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116)이재학

    (상) 이박사의 명성은 해방 전부터 익히 들어봤던 것이나 내가 이 박사를 인상깊게 기억하게 된 것은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선거직후의 일이다.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서울에 올

    중앙일보

    1972.06.19 00:00

  • (35)농아에 심는「일자승천 금」|진해 농아학원장 김무현씨

    『벙어리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가슴을 치며 겨우 짜내는 진해시 농아학원(장천동372) 김무현 원장 (54)의 절규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 벙어리는 교육을 받으려고 애쓴다. 그

    중앙일보

    1972.06.10 00:00

  • (477)경무대 사계(104)

    이 박사가 발바리 개「해피」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해피」를 이 박사는 망명길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 이런 사실에서도 이 박사가 「하와이」에 오래

    중앙일보

    1972.06.05 00:00

  • (458)경무대 사계(85)|김상래(제자 윤석오)

    이 박사는 앞에 말한 것처럼 수목과 동물을 무척 사랑했는데 취미가운데 낚시이외에 한시 짓기와 붓글씨 쓰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하오시간에 틈이 나면 이 박사는 붓글씨를 쓰기도 하고

    중앙일보

    1972.05.13 00:00

  • 어린이날 선물…어머니와 함께 읽는 동화

    꿈 장수 기야이 아저씨네 집은 아주 깊은 산골에 있읍니다. 사방 어느 곳을 들러봐도 나무 나무 나무…나무뿐이고, 사방 어느 곳을 둘러봐도 꽃 꽃 꽃…꽃뿐이고, 그래서 뺑뺑 어지럽게

    중앙일보

    1972.05.05 00:00

  • (350)제24회 발명학회(4)

    관계자들의 끈덕진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조선」은 창간1년 만인 34년6월 일단 휴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가는 10전이고 「페이지」수는 창간 때 27「페이지」, 많을 때

    중앙일보

    1972.01.07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