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830)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9)|박갑동

    나는 6월26일「라디오」방송에 의하여「유엔」이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군의 공격을 침략이라고 인정하며 38선 이북으로 철퇴를 요구하는 결의를 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27일에는「유엔

    중앙일보

    1973.08.24 00:00

  • (830)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8)|박갑동

    6월 중순에 들어서자 전에 월북했던 남로당원을 서울시내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천 수상서에는 월남하다가 잡힌 남로당원이 7, 8

    중앙일보

    1973.08.23 00:00

  • (829)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7)|박갑동

    김일성은 전 힘을 무력통일에 집중시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최고기관으로서 최고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멤버」는 김일성 박헌영 허가이 이승엽 김두봉 김책 강건 등 7명으로 구성하

    중앙일보

    1973.08.22 00:00

  • (828)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6)|박갑동

    전회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평양의 김일성은 4월의 정치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전쟁준비를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정치위원회 결정의 제1의 조항인『당 기관·정권기관·민청·직업동맹(노

    중앙일보

    1973.08.21 00:00

  • (825)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3)

    박헌영의 입장은 곤란하였다. 남로당지하당의 평화통일 방안을 중요한 자료로 제출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로당지하당이 괴멸된 이상 자기의 발언의 무기가 줄어든 것을 느끼지 않을

    중앙일보

    1973.08.17 00:00

  • (824)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2)

    김삼룡이 잡히고, 이주하가 잡히고, 그리고 또 정태식까지 드디어 잡히고 말았다. 이 세 사람이 잡혔다는 것은 남노당 지하당의 괴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실 박헌영의 발 밑에서,

    중앙일보

    1973.08.16 00:00

  • (819)|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37)-박갑동>

    북한의 군사 정세는 이상 본 바와 같으나 1949년이라는 해는 김일성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바쁜 해였다고 볼 수 있겠다. 당시 북한은 그 나름대로 자체 안의 경제 상

    중앙일보

    1973.08.10 00:00

  • (818)내가 아는 박헌영(136)|박갑동(제자 박갑동)

    무력준비에 나선 북한은 1949년 7월에는 「조국보위후원회」(군사후원회)를 면·이 등 행정단위의 말단까지 조직하고 민간에서 비행기와 전차를 구입, 헌납하는 운동을 일으켜 군비확장

    중앙일보

    1973.08.09 00:00

  • (817)내가 아는 박헌영(134)|박갑동(필자 박갑동)

    김삼룡이 정태식에게 시달한 지시는 「남로당 지하당의 남북통일에 관한 정책입안의건」이었다. 기한은 3윌25일까지였다. 남로당지하당의 남북통일안을 평양의 박헌영에게 보내는 것은 3월

    중앙일보

    1973.08.08 00:00

  • (816)내가 아는 박헌영(134)|박갑동(제자 박갑동)

    1950년1월2일 밤 이날 밤은 나에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날의 밤이었다. 그것은 내가 수사기관에 포위되었다가 무사히 벗어났다는 기억에서만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중앙일보

    1973.08.07 00:00

  • (815)내가아는 박헌영

    기진맥진 이모의 집은 큰집이 되어서 가운데 복도가 있어 그 양쪽에 방이있고 또 앞뜰에면한쪽에복도같은 마루청이 있었다. 가운데 복도는 현관에 직결되어 있기때문에 수사기관원들이 가운데

    중앙일보

    1973.08.06 00:00

  • (813)내가 아는 박헌영

    이논진부의 고민 정태식과 김삼룡과 나와 세사람이 인적기가없는 캄캄한 서울운동장뒷길을 걸어가며 밀담을 하고 있을때 우리앞에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몇걸음

    중앙일보

    1973.08.03 00:00

  • (812)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

    내가 기관지부 이론진「블록」통제지도 부책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중앙선부부도 맡게되어 나의 일은 불어났다. 매일 기관지부·선전부·이론진의 각 책임자 그리고 각부의 중요간부들과

    중앙일보

    1973.08.02 00:00

  • (809)|내가 아는 박헌영-정태식의 도피

    정태식을 맞은 30세 가량되어 보이는 미인 이 집주인 채항석의 부인은 바로 군공시대 수도경찰청장이며 대한민국 초대 외무부장관 장택상씨의 장녀 장병민이었다. 그녀의 남편 채항석은 동

    중앙일보

    1973.07.30 00:00

  • (808)|내가 아는 박헌영(126)-이론진 「아지트」

    1949년 봄에 「노력 인민」의 제 일면을 당당하고있던 김장한이 「이론진」이 부책으로 발탁되어 「노력 인민」의 편집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당 중앙최고지도부의 편성은 최고책임

    중앙일보

    1973.07.28 00:00

  • (807)|내가 아는 박헌영(125)-강·표 등 북한 도주

    1949년5월5일 강원도 38선 접경지대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장 강태무와 표무원등 2명이 일부대원을 속여 인솔하고 38선 이북으로 도주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도 세간 일반에

    중앙일보

    1973.07.27 00:00

  • (489)-미결의 종장(4)

    1954년 6월15일, 이날 「제네바」회의는 6·25 전쟁과 관련된 한국 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공식으로 선언하였다. 이는 곧 국토 분단선의 이름이 38선에서

    중앙일보

    1973.07.27 00:00

  • (806)|내가 아는 박헌영(124)-여순사건의 저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지 두달 남짓한 48년10월19일 밤 여수주둔 제14연대가 돌연 반란을 일으켰다. 정말 이것은 돌발사건이었다. 정부측에서도 몰랐고 남로당 측서도 몰랐다. 그해

    중앙일보

    1973.07.26 00:00

  • (805)|내가 아는 박헌영(123)-지하 선거

    이렇게 하여 선출된 선거인들은 8월29일 해주에서 모여 남한선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백60명을 선출하였었다. 이때 발표한 숫자에 의하면 그때 이 지하선거에 참가하여 도장을 찍은

    중앙일보

    1973.07.25 00:00

  • (804)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22)

    박헌영이 이끈 남로당은 38선 이남만의 정권을 수립하는데 반대의 입장을 취하여 왔었다. 박헌영과 남로당은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지지를 성공시킴으로써 남북의

    중앙일보

    1973.07.24 00:00

  • (803)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21)

    김구가 서울에 돌아와서 쓴 「한국독립당 북한방문보고서」(당외 비밀문건)에 의하면 김일성의 북한에 있어서의 시책을 축조비난하고 김일성의 북로당과 김구의 한독당은 공존할 수 없다는

    중앙일보

    1973.07.23 00:00

  • (802)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20)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익 거두의 한사람인 한국 독립당 위원장 김구는 UN 한국위원단에 대하여 ⓛ미·소양지역 주둔군은 동시 철병할 것 ②그후 남북정치요인이 협의할 것 ③이 남북

    중앙일보

    1973.07.21 00:00

  • (801)내가 아는 박헌영-제31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대한 『적극적 「보이코트」』지령에 따라 공산당이 대대적인 무장폭등 장소로 택한 곳이 제주도다. 남로당이 굳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를 택한 이유는 지

    중앙일보

    1973.07.20 00:00

  • (800)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18)

    미·소 공위가 깨어지고 48년 1월초 한국에 온「유엔」이 임시 조선위원단이 남한만의 단독선거실시를 결정하자 공산당은 단독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남로당

    중앙일보

    1973.07.1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