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381)-제자는 필자|경무대 사계(8)

    이 박사는 비서들에게 필요이외의 정담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산책에 함께 따라 나섰을 때면 이따금 심경을 말하곤 했다. 「하지」를 『바보 같은 장군』이라고 맞대놓고 욕해준 뒤라고

    중앙일보

    1972.02.12 00:00

  • (379)-제자는 필자|경식대 사계(6)

    이 박사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자를 경계했지만 초기에는 하지의 권고 때문에 좌우합작을 해보려고 했다. 박헌영과 몽양(여운형)도 만나고 설산을 내세워 좌파와 합작협상을 시켰다. 공산당

    중앙일보

    1972.02.10 00:00

  • 거창사건⑨

    1951년4월24일에 이승만대통령은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 6·25의 책임을 물어 신국방을 사퇴케 하라는 끈덕진 국회와 국민여론에도 불구하고 강을건너다 말을바꿔어 탈 수 없

    중앙일보

    1971.12.20 00:00

  • (7)이상수 박사

    『몸이 편찮아서 오신 길이지만 아침저녁 어머니 얼굴을 대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습니다.』한국과학원장 이상수 박사(46)는 강릉 본가의 어머님을「낙상 치료」의 명분으로라도 오래 서울

    중앙일보

    1971.05.17 00:00

  • 황성기숙청녀회(23)>YMCA의 수난

    『일본 Y는 교합식, 한국Y는 학교식, 중국Y는 운동식』이라는 평이 있었다. 이것은 아마 어민Y평 논가가 미국의 백화점토이던「와나메이카」씨가 거액의 돈을 기부해서 한국·일본·중국

    중앙일보

    1971.03.31 00:00

  • (113)-제자는 필자|황성기독청년회(10)-오리 전택부

    전 공화당 의장이던 정구영씨(1896년 생)는 사촌인 정구창(혼자서 제1회로 졸업) 정구평씨와 같이 초립 동인 때부터 Y서 자랐다. 옛날을 회고하면서 정구영씨는 Y마당 그 좁은데서

    중앙일보

    1971.03.23 00:00

  • (103)양식반세기(10)|이중일(제자는 필자)

    해방 후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우리 나라는 피나는 발돋움을 했는데 처음으로 부닥친 것이 유엔 한국위원단 일행의 방한이었다. 어수선한 국내사정 속에 대한민국 정부

    중앙일보

    1971.03.11 00:00

  • (94)적 치하의 3개월(7)|지하의 시련(4)|「6·25」20주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적 치하 3개월 동안에 받은 인명피해는 기록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16만5천명이 피살되고, 12만3천명이 이북으로 납치되었다. 서울시에서 만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민간인 9천5백 명

    중앙일보

    1970.11.04 00:00

  • (123)해방에서 환국까지

    영친왕이 그토록 조국을 그리워하고 대비마마를 사모하는 지성에 감동하여 방자 부인도 남편을 따라서 한번은 마음먹었던 일본에서의 영주를 단념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였는데 그때

    중앙일보

    1970.09.30 00:00

  • (26)「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대통령의 피난(하)

    이승만 대통령이 27일 새벽 3시에 경무대를 떠날 때 각료나 국회나 육본에 대해 피난 간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알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부각료들은 이날 새벽 안으로 대통령이 서울을

    중앙일보

    1970.05.29 00:00

  • (10)가장 길었던 3일(10)

    북괴남침이 있은 후 이대통령이 직접국민에게 사태를 담화로 알린 것은 27일 밤 10시부터 서너번 되풀이된 KBS의 녹음방송이 처음이었다. 25일 상오 10시쯤 남침 제1보를 받은

    중앙일보

    1970.04.22 00:00

  • 프란체스카여사|한국에 영주…귀국결심

    「오스트리아」의 수도「빈」에서 홀로 여생을 쓸쓸히 보내고 있던 고 이승만박사의 부인「프란체스카」여사(70)가『손자 병구군(1)을 키우며 아들내의와 함께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

    중앙일보

    1970.03.24 00:00

  • 또하나 거목이 쓰러지다

    나라의 큰기둥이 또하나쓰러졌습니다. 불의에 용감했고 사악에 직언하는 거목이 사라졌읍니다. 정계의 원로이자 국민의지도자인 창낭의운명은 이나라의 큰 손실입니다. 이나라 정치는 당신의

    중앙일보

    1969.08.02 00:00

  • 돌아본 그때의 개헌

    헌법개정논의가 가열되고 있는가운데 또 한번의 제헌절을 맞는다. 한국헌법은 21년의 짧은 역사속에서 5차례 개정의 시련을 겪었다. 그때마다 개헌은 그토록 불가피했던 것인지一 당시의

    중앙일보

    1969.07.16 00:00

  • 제3차 내각책임제 개헌

    4.l9혁명직후인 60년6월 무력해진 자유당의 동조를 얻어 내각책임제개헌을 실현하여 제2공화국의기틀을 잡았다. 이것은 1인독재를 구축하기 위한 두차례 개악으로 얼룩진 우리의 헌법을

    중앙일보

    1969.07.16 00:00

  • 미 내무성 재정고문 「해럴드·레이디」씨

    1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워싱턴」의 변호사「스태거」씨는「토머스·마사리크」박사의 「체코슬로바키아」독립운동을 묵묵히 돕고있었다. 미국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일류변호사가 약소

    중앙일보

    1968.10.17 00:00

  • (3)|법무부장관|정부수립때주역과 현역이 엮는 성년한국상

    『허-이장관, 벌써 반백이구료. 올해몇이시오…』먼저 와있던 초대 법무이인옹은 이호현법무가 들어서자 이렇게 놀라운 듯 반갑게손을 잡았다. 『쉰넷 입니다만…』이장관은 깍듯이대답하며 두

    중앙일보

    1968.08.12 00:00

  • 가시밭길 헌법20년|17일 제헌절을맞아 엮어본성년사|개헌 다섯번의 기복

    5·10 국회의원선거를 두어달앞둔 1948년 3월중순의 어느날 한국민주당의 김성수씨와 독립촉성국민회의 신익희씨는 헌법학자인 유진오씨를 초치, 『우리나라의 기본법이될 헌법초안을 만

    중앙일보

    1968.07.16 00:00

  • 반대의견의 의의

    언론자유가 민주정치의 절대적요건임은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적 엄연한 사실이거니와 우리 헌법에도 또한 언론자유의 보장이 엄격히 규정되어있다. 이는 인간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전제로한

    중앙일보

    1968.05.09 00:00

  • 다가오는 총선에 앞서…(2) - 이재학 자유당 의장

    『야당이 통합되었다고 해서 마치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떠들어 댑디다만 이게 어디 당초의 뜻대로 야당이 단일화 된 거요? 신민당이란 당명 그대로 한때 갈라섰던 신한당과 민중당이

    중앙일보

    1967.02.18 00:00

  • 하는사업 없다지만 정계진출 의욕 대단|등산·골프로 건강만점

    이박사 10년 집권에 처음부터 총애를 받고 날이 갈수록 더욱 신임을 얻어 계속해 그를 모실 수 있었던 사람으로는 유태하(58)씨를 손꼽을 수 있다. 51년에 주일대표부참사관으로 건

    중앙일보

    1966.06.11 00:00

  • 기적의 구사일생

    심장에서 머리로 피가 통하는 목줄에 생긴 혹 (총경동맥류)이 야구공 만하게 부풀어 파열직전에 있던 가난한 집의 한 소녀가 뛰어난 집도자와 독지가를 만나 아슬아슬하게 생명을 건졌다.

    중앙일보

    1965.11.19 00:00

  • 글자와 말

    기념식을 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연설을 하시고, 백일장을 벌이는 정도로 금년「한글날」 이 끝나면 결국 해마다의 허사. 한글이 나라의 으뜸가는 자랑이라 하여 신주단지 같이 모셔만 놓고

    중앙일보

    1965.10.09 00:00

  • 회상속의 퇴역장군|딘소장, 임상재 특파원과 회견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도왔고 6·25의 수난을 가장 비극적으로 겪은 미국의 퇴역 육군 소장 「윌리엄·F·딘」씨는 고난속의 한국을 회상하면서 발전하는 오늘의 한국을 보고파했다. 1

    중앙일보

    1965.09.22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