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225)제16화 한·미 합동첩보비화「6006부대」(4)

    『MIG-15의 정체를 알아내라』-. 6·25동란이 한해를 넘긴 1951년 이른봄 미극동공군사령부를 발칵 뒤집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북지역에 작전임무를 수행하러 떠났던 12대의

    중앙일보

    1971.08.06 00:00

  • 간첩작전 유공표창

    공군은 23일 상오 ○○기지에서 김두만 공군참모총장을 비롯, 「로버트·멜로이」 주한 미 공군사령관 등 한·미 공군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팬텀」전투비행 전대에 대한 국방장관부대 표

    중앙일보

    1971.06.23 00:00

  • 귀순한 박순국씨 공군소령에 임명

    정부는 지난해 12월3일「미그」15기를 몰고 월남 귀순한 전 북괴 소좌 박순국씨를 10일자로 공군소령으로 임관키로 했다. 김두만 공군참모총장은 10일 상오10시 총장실에서 박 소령

    중앙일보

    1971.06.09 00:00

  • 국무총리에 김종필씨-어제 하오 전격개각

    박정희 대통령은 3일 하오 백두진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 각료의 일괄 사표를 수리하고 국무총리에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를 임명했다. 7대 대통령을 보좌할 새 내각에는 이밖에 ▲외무=김

    중앙일보

    1971.06.04 00:00

  • (176)연희고지 전투|「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1) 9월20일 새벽에 행주에서 한강을 건넌 미 제산 군단 산하 제1해명사단 5연대와 한국군 해병대는 이대로 진격이 순조로우면 22일께면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리라고 예상했다. 「

    중앙일보

    1971.05.17 00:00

  • (173)낙동강아 잘있거라(5)

    (하) 괴뢰군이 38선을 넘어 낙동강 교두보 일대에 도달하여 공격을 개시하기까지는 약 한 달이 걸렸다. 즉 수도서울은 3일만에, 대전은 20일만에 각각 점령했지만 그들이 낙동강에

    중앙일보

    1971.05.10 00:00

  • (162)-인천 상륙(5)|「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이 작전」

    「맥아더」원수가 절대 자신을 갖고 인천 상륙 계획을 추진하게 된 큰 동기는 「유엔」군이 제공·제해권을 꼭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개전 초에 북괴 공군의 「야크」들은 서울·김포·수원

    중앙일보

    1971.04.14 00:00

  • (160) 워싱턴과의 논쟁 (1)|인천 상륙 (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해리·S·트루먼」미 행정부가 북괴의 남침 후 한국 문제에 관한 정책을 우선 결정하고 그 후에 「유엔」의 추인을 받은 것과 비슷한 경우가 실제 전쟁 지휘에 있어서 현지 군사령관인

    중앙일보

    1971.04.09 00:00

  • 최우수 부대에 팬텀 전대

    공군 팬텀 전투 비행 전대가 국방부 최우수 부대로 뽑혀 2일 상오 ○○기지에서 김두만 공군 참모 총장을 비롯, 한미 고위 장성들이 참석한 가운데 표창식을 가졌다. 최우수 부대가 된

    중앙일보

    1971.04.02 00:00

  • 팬텀 F4D 3개 대대 군사배치 완료

    주한 미 공군 제3전술전투비행단이 15일 하오1시 군산공군 기지에서 김두만 공군참모총장, 미제5공군사령관「고든·M·그레이엄」중장, 주한 미 공군사령관「멀로이」소장 등 한미 군 고위

    중앙일보

    1971.03.15 00:00

  • 김 공참총장 귀국

    김두만 공군참모총장은 약 2주일 일정으로 동남아 각국 군사 시설을 돌아보고 28일 하오 5시 미 공군 특별기 편으로 김포공항 착 귀국했다.

    중앙일보

    1971.03.01 00:00

  • (140)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돌출부의 혈전(3)|낙동강 공방전(22)

    적은 마지막 9월 총공세 때 돌출부에 대해 또 한번 강습을 시도했다. 낙동강 교두보에 대한 8월 공세가 좌절 된지 대체로 10여일 후에 재게된 적의 9월 공세는 그들로서는 승산의

    중앙일보

    1971.02.19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83)|창군전후(2)|이경석

    내가 일본육사 제45기생으로 졸업한 것은 1933년. 신의주 고등보통학교 4학년 때 미국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영화에서 본 것이 육사를 지망한 동기였다. 당시에는 교육 총감부라는데

    중앙일보

    1971.02.16 00:00

  • 고문 18명 추대|대한 야구 협회

    대한 야구 협회는 10일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등 18명을 상임 고문으로 추대했다. ▲상임 고문=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임철순 (중대 부총장) 박동묘 (성대 총장) 방우영 (조선

    중앙일보

    1971.02.11 00:00

  • 교통장관 장성환씨

    박정희 대통령은 28일 백선환 교통부장관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에 장성환씨(국제관광공사 총재)를 임명했다. 박경원 내무장관과 백 교통장관은 KAL기 납북미수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표

    중앙일보

    1971.01.28 00:00

  • 교통부장관 장성환 예비역 중장

    서울태생이며 6천시간의 비행기록을 가진 예비역공군중장. 경기중학을 거쳐 조도전대의 상학부를 나온 그가 공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일본항공대입대였다. 2차 대전 중 만주 「뉴기니아」의

    중앙일보

    1971.01.28 00:00

  • 「흐루시초프」의 회고|진위 말썽 속의「망명」비록|제3부 베리아 숙청

    【뉴요크7일=김영희 특파원】전 소련수상「니키타·흐루시초프」는 7일「라이프」지에 실린 그의 회고록 제3부에서 한때「스탈린」의 후계자로까지 물망에 올랐던 비밀경찰 두목 「베리야」의 위

    중앙일보

    1970.12.08 00:00

  • 중경고에 장학금 천만 원

    이병철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은 11일 낮12시20분 중경고등학교(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4의1) 회의실에서 장학금으로 금일봉을 동교 재단이사장 정내혁 국방부 장관에게 내놓았다. 중경

    중앙일보

    1970.11.11 00:00

  • (56) 제2본영... 수원(3)|「6.25」20주... 3천여의 증인 회견. 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맥아더」원수가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그 이튿날인 6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군 최고 지휘부의 이동을 단행했다. 바로 이날 아침 미국에서 급히 돌아온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중앙일보

    1970.08.07 00:00

  • 전투력·군기 강화 논의

    정래혁 국방부장관 취임 후 첫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6일 하오 국방부 회의실에서 정 장관 주재로 열렸다. 3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과 관구 사령관 급 이상의 전군 주요지휘관이

    중앙일보

    1970.08.06 00:00

  • (54)「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제2본영…수원①|「맥아더」의 내한(상)

    수도 서울이 공산군 수중에 들어간 후 며칠동안 수원에서는 여러 가지 극적인 일들이 많았다. 큰 비행장이 있는데다가 후퇴한 육본이 이웃 시흥에 자리잡은 입지적 여건에 겹쳐, 처음에

    중앙일보

    1970.08.03 00:00

  • 동정

    ▲박정희 대통령은 1일 신임 김두만 공군참모총장과 김성룡 전 총장으로부터 이·취임 신고를 받았다. ▲박병배 신민당 정책심의회 의장은 약 1개월간의 방미를 마치고 1일 저녁 공로 귀

    중앙일보

    1970.08.01 00:00

  • 공군 강화를 논의

    박정희 대통령은 13일 상오 미 공군참모총장 「존·D·라이언」대장의 방문을 받고 요담 했다. 한국 측에서 정내혁 국방장관. 김성룡 공군참모총장이, 미 측에서 「포터」주한 미 대사와

    중앙일보

    1970.07.13 00:00

  • 국군 수뇌의 이동

    지난 3월 정부는 합참 의장과 공군 참모 총장 등 군 수뇌부 이동을 단행했다. 심흥선, 한 신, 김두만 세 중장을 각각 대장으로 승진시켜, 심흥선 대장을 합동 참모회 의장에, 김두

    중앙일보

    1970.07.0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