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수퍼 엔고’ 끝났다 … 착시현상 벗어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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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달러당 75엔까지 갔던 엔화 환율이 올 들어 가파르게 올라 83엔 선을 넘나들고 있다. 미국의 서브 프라임 사태와 유럽 재정 위기로 비롯된 ‘수퍼(super) 엔고’ 시대가 막을 내릴 조짐이다. 지난 3년여간 일본 경제는 비틀거렸지만 엔화는 독보적 강세를 이어 왔다. 엔화가 달러나 유로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피난처로 여겨진 탓이다. 최근 미국·유럽 경제가 회복 기미를 보이고, 일본이 엔고 저지에 팔을 걷어붙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일본은 10조 엔이 넘는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을 단행했고, 일본은행은 물가목표제(inflation targeting)까지 도입하면서 엔화를 풀고 있다.

 당분간 엔 약세를 내다보는 관측이 대세다. 일본의 신용등급이 낮아졌고, 무역수지도 적자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성장은 바닥을 기고 있고, 재정부실 등 구조적 불안요인들도 도사리고 있다. 일본의 초저금리에다 엔 약세 전망이 우세해지면 엔 캐리 트레이드도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다. 엔화가 국내에서 빠져 나와 해외로 나갈수록 엔화 가치는 더 떨어지게 된다. 국제 금융시장이 추가적인 엔 약세를 점치는 배경의 하나다.

 엔 환율의 급변동은 한국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기전자·자동차·화학 등 양국의 주력 수출품목들이 경쟁관계이기 때문이다. 엔 캐리 자금도 금융시장이 개방된 한국 시장에 집중되기 십상이다. 그동안 한국은 수퍼 엔고의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려온 게 사실이다. 일본 수출 기업들이 죽을 쑤는 사이 우리 수출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의 실적을 냈다. 자기 실력이라기보다 ‘엔 강세-원 약세’의 환율 효과가 명암을 갈랐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아직 엔 환율은 수퍼 엔고를 시정(是正)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앞으로 엔화가 추세적 약세를 보일지 속단할 수도 없다. 문제는 오랫동안 지속된 엔 강세에 우리 기업들이 지나치게 익숙해져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언제까지 엔 강세가 계속되리라 믿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과거 엔 환율 변동에 따라 냉온탕을 오간 쓰라린 경험을 되새겨야 한다. 1980년대 후반 달러당 80엔대의 엔 강세로 한국 경제는 ‘3저 호황’을 누렸다. 반면 90년대 중반 엔 환율이 120엔까지 치솟자 한국은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면서 외환위기를 맞았다.

 물론 엔 약세로 우리 경제가 곧바로 치명상을 입는다는 것은 선입견일 수 있다. 우리 수출 구조도 크게 달라져 엔 환율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럼에도 엔 약세는 분명한 악재(惡材)다. 미리 여유가 있을 때 대비할 필요가 있다. 우선 엔 강세의 착시(錯視)현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수출기업들은 국내-해외 생산비중을 조절해 환율 변동에 보다 중립적인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기술과 품질 같은 비(非)가격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수출시장 다변화를 서둘러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올해는 3%대 중반의 저성장에다 오일 쇼크까지 우리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여기에 엔 약세까지 겹치면 고통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서둘러 엔 약세의 완충장치를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