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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탄생 100주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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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신준봉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

새해 첫 달, 신년 기자간담회가 많았다. 개신교 목사, 가톨릭 신부, 불교의 각 종단 관계자 등 다양한 종교인들을 만나는 자리를 빌려 잠시나마 종교별 특징을 살펴볼 수 있었다. 불교 조계종의 가장 힘센 어른인 총무원장 스님과 점심을 먹고, 가톨릭 주교회의 소속 홍보국 신부님들과 저녁을 먹은 날도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기자에게는 여러 종교 중 특히 불교의 교리가 인상 깊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삶에 대한 감각에 보다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다. 가령 『불설비유경(佛設譬喩經)』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꽤 알려진 얘기다. 지루함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하면 이렇다.

 한 남자가 코끼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급한 나머지 칡넝쿨을 타고 우물로 내려갔다. 알고 보니 우물 바닥에는 독사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뿐인가. 우물 중간 벽에는 작은 뱀들이 기어다니고 있다. 설상가상,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칡넝쿨 윗부분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시간 문제. 한데 어디선가 날아온 벌 다섯 마리가 역시 칡넝쿨 윗부분에 집을 지었다. 꿀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남자는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왜 꿀이 더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이야기는 어리석은 인생에 대한 비유다. 코끼리는 세월, 독사는 죽음,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 작은 뱀은 질병을 말한다.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五欲), 즉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이다. 곧 죽어나갈 줄 모르고 탐욕에 빠져 정신없이 지내는 게 우리네 아둔한 인생살이라는 거다.

 그 때문에 불교는 부단한 수행을 강조한다. 그래야 어리석음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거다. 특히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갈고 닦으면 허망한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역할을 강조하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이다. 큰 스님 성철(性徹·1912~93)은 불교의 이런 특징을 ‘절대적 인간관’이라고 했다. 그가 1967년 해인사에서 행한 법문을 엮은 책 『백일법문(百日法門)』에서다.

 문제는 역시 실천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나약한 인간이 절대적인 행복의 경지, 해탈(解脫)에 이르기까지 온갖 번뇌와 욕망, 집착을 철저히 내려 놓는 일이 그리 쉽겠는가. 분규로 얼룩졌던 과거 조계종의 모습은 인간적인 나약함에서 비롯된 결과일 게다. 주지 선출을 앞두고 정초부터 금품 수수 의혹이 일고 있는 최근 범어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철 스님이 더 생각난다. 빼어난 선사(禪師)로서의 업적뿐 아니라 스님은 지독한 근검절약으로도 모범을 보였다. 소박한 식단을 고수했고 일흔이 넘어서까지 옷가지를 손수 기워 입었다. 휴지 한 장을 허투루 썼다고 제자를 혼쭐 낸 경우도 있다.

 올해는 스님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스님이 살아서 범어사 문제를 보고받았다면 어떤 불호령을 내렸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