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퇴직자 양산 시대, 노동운동도 변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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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인구 113만 명의 공업도시 울산은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곳으로 꼽힌다. 평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 달러를 넘는다.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삼성정밀화학 등 울산에 있는 22개 상장회사의 평직원 연봉이 6645만원에 달하고, 평균 근속연수도 전국에서 가장 길다는 조사도 있다. 그런 울산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1955~63년에 태어난 베이비 부머(baby boomer)의 정년퇴직(55~59세)이 임박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인구학적으로 앞으로 매년 1만여 명이 정년을 맞아 직장에서 무더기로 퇴출당할 예정이다. 이는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에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그동안 우리 노동계는 투쟁에 지나치게 몰두했다. 그중에서도 퇴출 위기 없이 일자리를 고수하는 것을 최고의 능사로 알았다. 그 결과 울산지역 취업인구 중 50~59세는 2000년만 해도 4만7000명(전체의 10.7%)이었으나 지난해에는 10만6000명(19.9%)로 치솟았다.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의 경우 48~59세 근로자가 각각 40%와 54%에 이른다. 고령화 사회가 다가왔는데도 조합원들은 현재에 안주하고 퇴직 후 삶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했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퇴직지원센터 설립에 나서고, 현대차가 ‘고령화대책 노사공동연구팀’을 구성한 것은 노동운동의 변화를 시사하는 단초라고 할 수 있다.

 울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부터 정년(만 55세 기준)을 맞아 전국의 직장에서 베이비 부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생소한 사회 환경에 노출돼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있다. 자영업에 뛰어들어 돈마저 날리거나, 아예 오갈 곳이 없는 실업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철밥통’으로 불리는 대기업 노조원이라고 은퇴를 피할 길은 없다.

 울산에선 하릴없이 집에서 꼬박꼬박 세 끼를 챙겨먹는 ‘삼식이’라든가 ‘황혼이혼’ 등 쓴웃음을 짓게 하는 농담들이 은퇴를 앞둔 노조원들 사이에 회자한다고 한다. 지금 조합원들은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노조에 요구하고 있다. 이념·정치 투쟁에서 탈피해 실용주의로 전환하는 노동운동의 새 패러다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