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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한 한마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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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기택
시인

“요즘 ○○○씨는 왜 수업에 안 나오시나요?”

 “모르셨어요? 그분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일반인을 위한 시창작 교실에서 강의할 때 있었던 일이다. 열심히 나와 공부하던 수강생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칠순에 가까웠지만 그는 진지하게 강의를 듣고 시도 자주 써냈다. 시를 잘 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즐긴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강의실에 앉아 있을 때 심각한 병을 앓았을지 모른다. 이미 죽음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가 무엇이기에 죽음이 강제로 중단시킬 때까지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쓰려고 했을까?

 시를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한 어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나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선배들이다. 자기 분야에서 만만치 않은 업적을 쌓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운 사람들이다. 한때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가족과 일을 위해서 부득이 꿈을 접은 과거도 있다. 그러나 걸음마를 하듯이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 위해 젊은 선생에게 무안한 지적을 받는 것을 즐겁게 감수하고 있다. 시를 쓰기에는 머리도 굳어버리고 언어를 다루는 순발력도 떨어졌지만 새로운 꿈을 위해 사소한 창피함을 무릅쓰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배움을 통해 삶의 활력을 찾으려는 노년 인구는 많아졌다.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어른들도 꽤 있다. 한 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에는 일흔 살 안팎의 학생 몇 명이 입학했는데,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을 작품으로 남기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삶을 자서전으로 남기기 위해서 등 입학 동기가 다양했다고 한다. 노년의 문예창작 공부는 여가 선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찾으려는 절박한 선택일 수도 있다.

 시 쓰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진정한 말을 찾는 일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말은 대부분 헛말이다. 웃자고 하는 말,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말,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 쓸모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말이다. 꼭 필요한 한마디 말을 위해 열 마디, 백 마디의 윤활유를 쳐야 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러나 그 말들은 사회와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수단이지 개인이 내면에 지닌 간절한 욕망과는 별 관계가 없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말은 단어와 단어가 이어진 소리의 연속일 뿐이며 내면의 진정한 욕망과는 거의 닿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진실은 말에 닿을 듯하면서도 미끄러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시는 내면의 갈구를 충족시켜줄 것 같은 한마디를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시가 언어의 의미보다는 몸의 감각과 기억과 정서 같은 울림을 살리려고 애쓰는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노년의 학생은 좋은 시를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해 애쓴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진정성만 있다면 시를 쓰는 과정의 즐거움은 결과의 실패를 충분히 보상할 수 있다. 꼭 하고 싶은 절실한 한마디의 말을 끝내 찾지 못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찾는 일의 흥분과 긴장은 삶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상쇄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