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 몸 낮춘 오바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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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5일(현지시간) 아침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을 나섰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를 건너 영빈관인 블레어하우스까지 걸어갔다. 영빈관엔 미국을 대표하는 20명의 대기업 총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귀빈을 모시는 격식을 한껏 갖춘 것이다.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중간 휴식도 없이 바로 점심으로 이어졌다. 5시간 가까이 이어진 모임은 오후 2시15분이 넘어서야 끝났다.

 AP통신을 비롯한 현지 언론이 전한 이날 오바마와 재계 총수의 회동 장면이다. 지난 2월 재계 총수를 불러놓고 건강보험·금융 개혁에 협조하라고 압박했던 오바마의 서슬 퍼랬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시 워싱턴에 불려간 대기업 총수는 앞다퉈 투자·고용 확대 계획을 보고하기 바빴다. 심지어 오바마는 금융개혁법을 밀어붙이면서 월가 기업가를 “살찐 고양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오바마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는 “미국 경제의 성공을 이끈 주 엔진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가의 창의였으며 시장의 역동성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분으로부터 좋은 아이디어를 얻고자 한다”고 몸을 낮췄다.

 허심탄회한 대화도 오갔다. 오바마를 배석한 오스턴 굴즈비 백악관 경제자문은 “정부 정책의 불확실성 때문에 경영계획을 세우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고 말했다. 대기업 총수들은 오바마가 공화당의 부자 감세 연장안을 전격 수용한 걸 높게 평가했다.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시킨 것도 환영했다. 한·미 FTA가 조속히 의회 비준을 받도록 총력을 기울여달라는 주문이 나왔다.

 오바마가 재계를 향해 노골적인 러브콜을 날린 건 경제 살리기를 위해서다. 그는 소비 부양을 위해 ‘부자 감세’까지 받아들이며 ‘공화당과의 동침’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했다. 경제를 살리자면 일자리가 늘어나야 한다. 열쇠는 은행에 1조7000억 달러(약 2000조원) 규모의 현금을 쌓아둔 대기업이 쥐고 있다. 대기업이 투자에 나서지 않는 한 일자리 창출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오바마로선 중간선거 패배가 뼈아팠던 것으로 보인다. 집권 후 2년 동안 건강보험·금융 개혁에 이어 월가 보너스 규제까지 진보적인 개혁정책을 밀어붙였지만 민심은 오히려 그에게 등을 돌렸다. 이대론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집권을 꿈꾸기 어렵게 됐다. 고심 끝에 그가 꺼내든 카드는 경제 살리기였다. 공화당에 이어 재계와도 손을 잡은 건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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