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제2부 薔薇戰爭제5장 終章 :왕비감 놓고 설왕설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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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김양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오나 장보고 대사가 미천한 해도인이므로 또한 그 딸로 왕실의 배후를 삼는 일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상대등께오서 말씀하셨듯이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있으니, 어찌 삼갈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하(夏)나라의 왕 우(寓)는 부인이었던 도산(塗山)으로 인해 일어나고, 은(殷)나라의 왕 탕(湯)은 부인이었던 유화(有華)씨로 인하여 창성하였소이다. 그러나 주(周)나라는 포사(褒?)라는 여인으로 망하였고, 진(晋)나라는 여희(姬)라는 여인으로 문란하였소이다. 하오니 어찌 함부로 장대사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수가 있을 것이나이까."

"검교경 나으리."

상대등 예징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우리들도 선조의 도적을 멸한 공열이 모두 장보고 대사의 병력 때문임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선왕께오서 장보고 대사에게 감의장군이란 직책을 내리시옵고, 식읍 2천호를 봉하지 않으셨나이까. 그뿐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왕마마께오서는 친히 교서를 내리시어 장복을 하사하셨을 뿐 아니라 진해장군이란 직책까지 내리셨습니다. 이는 일찍이 조정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관직이었나이다."

예징의 말은 사실이었다.

문성왕이 내린 '진해장군'이란 관직은 신라의 조정에서는 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별직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흥덕왕으로부터 제수 받은 '청해진대사', 신무왕으로부터 제수 받은 '감의장군', 문성왕으로부터 제수 받은 '진해장군'의 관직들은 모두 장보고 한 사람만이 제수 받았던 특별한 직책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장보고 대사에 대한 논공과 행상은 끝이 났으며, 공덕에 대한 예우 역시 끝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나이다. 따라서 굳이 장보고 대사의 딸을 취하여 왕비로 삼을 이유는 없을 것이나이다."

"하오나."

시중 의종이 나서 말하였다.

"장보고 대사의 병력은 국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군세 또한 가장 막강하나이다. 만약 장보고 대사가 자기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지 아니한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면 아무도 이를 평정할 수는 없을 것이며, 온 나라는 또다시 전란에 휩싸일 것이나이다."

시중 의종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모든 대신들은 가슴 속에 그러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으나 차마 입을 열어 토해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제 겨우 30년만에 되찾은 평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또다시 장보고가 병력을 도모하여 난을 일으킨다면 나라의 존망마저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하였던 것이다.

"하오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사기에는 이러한 대신들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와 있다.

"조정에서는 장보고를 군사로 치자니 불측(不測)의 화가 있을지도 모르고, 또 그대로 내버려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우려에 쌓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대신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던 김양이 불쑥 입을 열어 말하였다.

"좋습니다. 그러하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대왕마마께오서는 왕비를 취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나이까."

"무슨 말씀이시나이까."

상대등 예징이 말하였다.

"대왕마마께오서 빨리 차비를 맞아들이시어 후사를 이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기록에 의하면 문성왕에게는 박씨라는 정비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일찍이 후사가 없었던 흥덕왕 사후부터 일어난 전란으로 보아 모든 대신들은 간절히 대왕이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좋습니다."

김양이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러면 바로 이 자리에서 신이 대왕마마의 왕비감을 보여드리면 어떠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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