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희망의 싹에 그친 코펜하겐 기후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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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2009년 12월 19일은 인류 역사에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게 됐다. 지구의 지도자들은 용감하지 못했다. 비겁하게 국가 이기주의의 뒤에 몸을 숨겼다. 그들은 식사도 거르고 밤샘 협상도 했다. 하지만 머뭇거릴 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눈앞에 어른거렸던 ‘호펜하겐’(Hopenhagen)은 신기루로 사라졌다. 지구의 지도자들은 2주일간 머리를 맞댔지만 ‘구체적 합의는 잠시 더 미룬다’는 데만 유일하게 합의했다. 제15차 유엔기후협약 당사국 총회가 막을 내렸다. 새로운 코펜하겐 협정(accord)은 지구 평균 기온이 섭씨 2도 이상 상승하는 것을 막고, 선진국들은 향후 3년간 온실가스 배출 억제를 돕기 위해 개발도상국들에 300억 달러를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유례없는 돌파구가 마련됐으며 국제사회가 앞으로 해야 할 행동의 토대를 구축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국제협정이면 당연히 가져야 할 법적 구속력이 없다. 반쪽짜리 합의문에 불과하다. 총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구의 지도자들이 ‘유의(take note)’를 촉구하는 이런 어정쩡한 협정으로 지구의 운명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오산이다.

코펜하겐 협정은 구체적인 알맹이가 없다. 정치 지도자들의 체면을 살리는 선에서 봉합됐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점은 구체적인 온실가스 억제 계획을 전혀 도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과 비교해 50% 이상 감축하지 않고선 평균 기온 상승을 섭씨 2도 이하로 묶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과학이다. 그런데도 참석자들은 지붕을 먼저 올려놓고 기둥은 나중에 맞춰 넣어도 된다고 우겼다. 차라리 이보 드 보어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 사무총장의 반성이 훨씬 설득력 있다. “냉정하게 보면 이번 협정은 사실상의 실패다. 온 인류의 희망과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코펜하겐 기후 총회가 ‘지상 최대의 정치 쇼’로 전락할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이 빗나간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참석자들은 뒤늦게 부산을 떨었다.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중국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막판에 마라톤 회담을 하는 시늉까지 냈다. 온 인류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세계 56개 주요 신문들은 “연장전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재경기는 안 된다”는 공동사설을 싣고 이들을 압박했다. 이번 회의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성과를 거둔 것은 이런 피플 파워 덕분이다. 이제 숙제는 내년 멕시코 기후회의로 넘어가게 됐다. 전원합의제로 진행되는 국제회의의 한계로 인해 또 실패할지 모른다. 눈앞의 재앙에 눈을 감는 정치 지도자들의 행태는 절망스럽다. 하지만 코펜하겐 회의에서 우리는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보았다. 온 인류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절박하게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부터(Me First)’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모두 함께 행동에 나서야 지구와 인류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 내년 멕시코 회의에선 결판을 내야 한다. 앞으로 남은 1년, 역사가 우리 세대를 평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