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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의 ‘뉴 노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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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우리 가게보다 더 싼 곳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일본의 종합잡화 판매점 돈키호테는 지난 14일 690엔(약 9000원)짜리 청바지를 내놓으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일본 최대의 유통업체 이온그룹이 880엔짜리를 내놓고, 세이유가 850엔짜리를 출시하자 ‘어디 내 자리를 넘봐’라며 내놓은 파격 염가 상품이다.

이들 상품은 모두 자사 브랜드(PB)들이다. 유통회사가 재료 조달과 수송·판매를 수직 계열화하면서 제조 비용을 낮추고 중간 도매상의 거품을 쏙 빼면서 가격을 낮췄다. 제조에서 판매까지 모두 아우른 미국식 공급망관리(SCM) 경영체제가 어느새 일본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 안에서 척척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염가 공세 상품은 의류에서 그치지 않고 가전·잡화 등 다른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일반 상품보다는 가격이 30~50% 저렴하다. 그러나 세계 2위 경제대국의 국민이 이런 이유만으로 구매할 리가 없다. 불황일수록 잘 팔리는 유니클로는 매장을 명품 브랜드 뺨칠 정도로 쾌적하게 고급화했다. 마케팅 기법도 진화한 것이다.

불꽃 튀는 경쟁으로 저가임을 나타내는 표현도 격렬해지고 있다. 과격할 정도로 싸다는 ‘격안(激安)’이라는 말도 부족해 ‘정열 가격’이라는 말도 나왔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용을 누릴 수 있도록 고객을 모시겠다는 정열을 담았다는 뜻이다. 소비자의 절약 심리를 파고든 업체는 경영실적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다. 유니클로를 판매하는 패스트 리테일링의 올해 영업이익은 일본 대형 백화점 ‘빅4’의 영업이익 합계를 앞질렀을 정도다. 올 들어 줄 잇고 있는 백화점의 도미노식 폐점은 브레이크가 없어 보인다.

이런 변화는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 명품이 너무 외면되다 보니 최근 긴자에선 미국계 명품 브룩스 브러더스가 매장을 철수했는데 그 자리엔 유니클로가 들어섰다. 프랑스 루이뷔통이 긴자에 내려던 세계 최대 매장 계획을 철회하고, 이탈리아 베르사체가 도쿄에서 매장을 철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업들도 가격을 낮추기 위해 과도했던 기능·품질을 낮추려고 애쓰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일본에서 ‘뉴 노멀(New Normal)’로 불리고 있다. 합리적 가격에 쓸 만한 상품을 소비하는 게 새로운 상식이란 얘기다. 경차의 비중도 승용차 중 절반에 육박했다. 불황이 지속되자 허세를 접어두고 실속을 중시하는 습관이 생활 속에 파고든 것이다.

뉴 노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보수 월간지 문예춘추 9월호는 ‘유니클로가 잘 팔릴수록 일본은 쇠망한다’고 경고했다. 소비자에겐 좋지만 저가 경쟁을 벌일수록 일본 경제의 활력이 쪼그라든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일본은행은 30일 일본의 잠재성장률이 0%대로 하락했다고 발표할 예정이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출구 전략을 논하고 있지만 일본은 나홀로 디플레이션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일본 경제의 소리 없는 변화가 일본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한국에는 무엇을 시사하는지 면밀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김동호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