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없다면 기술 가진 기업을 사라” … 블랙홀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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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모을 집>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광저우(廣州)를 중심으로 거대 산업 클러스터가 형성 중이다. 이들은 블랙홀처럼 주변 기업을 다 빨아들일 기세다. ‘빼앗지 않으면 빼앗기는 클러스터 경쟁’이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은 무엇인가.

중국 인민해방군 군인들이 27일 베이징에서 대형 오성홍기와 꽃을 들고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 연습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2일 상하이 취재 길. 푸둥(浦東) 금융가 취재는 오후 3시에야 끝났다. 오후 7시 닝보(寧波)에서의 만찬 약속은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남은 시간은 4시간 남짓. 운전사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메이원티(沒問題·문제없다)”라며 핸들을 꺾는다. 시원스럽게 뚫린 고속도로를 타고 50여 분을 달리니 자동차는 항저우(杭州)만 대교로 접어든다. 끝이 없는 듯했다. 30분을 달려도 자동차는 여전히 바다 위였다. 항저우만 대교 전체 길이는 36㎞. 서울의 남북 거리(약 25㎞)보다 길다.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세계 최장 해상 다리’라는 것을 실감했다. 식당에 도착하자 친구들은 “해상 만리장성(海上長城)을 타 본 기분이 어떠냐”며 반긴다.

중국이 ‘바다 위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는 무얼까. 답은 ‘양쯔강 삼각주(長三角)’에 있다. 상하이 주변 15개 도시로 구성된 양쯔강 삼각주 경제권을 3시간 생활권으로 묶겠다는 게 중국 정부의 뜻이다. 항저우만 대교가 건설된 이유다. 다리 개통으로 상하이~닝보의 거리는 7시간에서 3시간으로 단축됐다. 쑤저우(蘇州)·우시(無錫)·난징(南京) 등 주요 산업단지에는 다국적 기업이 수두룩하다. 이미 강력한 산업기반을 갖춘 상하이에 금융·물류 허브 기능을 더하겠다는 게 중국 정부의 야심이다. 산업과 물류, 금융이 어우러진 아시아 최대의 산업 클러스터가 상하이 주변에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상하이뿐만 아니다. 남부 광둥(廣東)성에는 광저우·선전·둥관 등을 포함하는 주장(珠江) 삼각주 클러스터, 북부엔 베이징·톈진(天津)을 중심으로 한 환(環)발해 클러스터가 웅크리고 있다. 양쯔강 삼각주 경제권은 이미 1조 달러에 육박하는 규모. 선진 7개국(G7) 중 미국·일본·독일을 제외하고 1조 달러의 경제 규모를 초과하는 도시 경제권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놀랍다. 게다가 이들 지역에는 연간 소득 1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 가구가 밀집돼 있어 소비의 핵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이 밖에 베트남 등 동남아를 겨냥한 난닝(南寧)의 베이부(北部)만 개발구, 창사(長沙)와 우한(武漢) 등 양쯔강 중류 도시를 묶은 창장(長江) 경제권, 선양(瀋陽)과 다롄(大連) 등을 중심으로 한 동북경제권 등도 고유의 산업에 특화하면서 클러스터 경쟁에 나서고 있다.


중국의 등장으로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던 ‘클러스터 경쟁’은 생존을 건 싸움으로 전개되고 있다. 각국은 과감한 투자 인센티브, 쾌적한 산업·주거·교육환경 제공 등을 내걸고 클러스터 키우기에 나서고 있다. 일본의 도쿄~오사카 클러스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연결하는 말레이 반도 정보기술(IT) 산업단지, 대만의 신주(新竹) 공업구, 최근 급성장 중인 중·베트남 접경 지역 클러스터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에도 있다. 수원~인천 중심의 수도권 IT 클러스터, 울산·거제도 등 남해안을 잇는 조선(造船)단지, 포항의 제철 클러스터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그 싸움에 중국이 뛰어들면서 ‘중국 쏠림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대만·한국 등에 퍼져 있던 노트북 컴퓨터 공장이 상하이로 몰리고 있는 게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동아시아 클러스터 경쟁은 이제 빼앗지 않으면 빼앗기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나라의 클러스터를 지켜내고, 더 확대시킬 수 있는 방안 마련에 지혜를 모아야 할 이유다. 더 좋은 환경을 찾아 떠나는 기업을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지 않도록 국내 산업 여건을 조성하는 건 우리 정부가 해야 할 몫이다. 그게 클러스터 경쟁에서 이기는 길이다.

  정영록 서울대 교수·한우덕 기자 yrcheo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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