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공문서 한자병용 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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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전통문화 계승 한글로도 된다

정부가 난데없이 공용 문서와 도로명을 한자로 병기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크게 잘못된 일이며 시의에 맞지 않는 처사다.

세종대왕은 배우기 어렵고 원시적인 중국의 한자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중국을 섬기는 모화사상이 판을 치던 사회에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민본 사상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한 나라의 글자 정책은 대단히 중대한 문제다.

한자의 병용문제는 정부에서 졸속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국민투표에 부쳐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1948년의 한글전용법에 "모든 공용문서는 한글로 적는다.

다만 당분간 필요한 경우에는 한자를 병용한다" 고 돼 있다.

'당분간' 이란 단서가 50년이나 끌어 왔으니 이제 단서를 떼버려야 할 때가 되고도 남았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 단서에 따라 공용문서에도 괄호 안에 꼭 필요한 한자를 병용하면 그만이다.

그것을 새삼 들춰내는 저의가 의심스럽다.

이 시점에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해야 한다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전통문화의 계승이고, 또 하나는 동양문화권간의 교류다.

여기서 근본 문제는 한자를 써야 전통문화가 계승된다는 오해에서 나온다.

전통 예절이나 관습.문화 등은 한글이나 말로 전달하면 되는 것이지 꼭 한자로 기록해야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영국인은 중세 영어로 쓴 셰익스피어의 문학 작품을 쉽게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작품은 현대 영어로 번역돼 영국인은 물론 전 세계가 애독하고 있다.

한자로 인쇄된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번역본으로 그 내용을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다.

전통문화의 계승을 위해서는 중세영어와 한문고전을 번역해 낼 수 있는 전문인을 양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도로명에 한자를 병기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일본인과 중국인을 위한 것이리라. 그러나 중국과 일본은 모두 간소화된 한자를 쓰는데 우리는 전통적인 정자를 쓰고 있으니 우리가 쓰는 한자로 병기를 해도 그들은 읽을 수가 없다.

우리가 중국에 가도 한자를 읽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한자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외국을 가 보아도 우리를 위해 도로명을 한글로 병기해 주는 곳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위해 한자를 적어 주어야 한단 말인가.한자가 아예 없는 영국.프랑스.미국 등지로 여행을 가는 일본인이 불편해 여행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우리는 하루 빨리 이른바 한자문화권이란 옹졸한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를 무대로 뻗어 나가야 할 우리가 언제까지 한자문화권에만 묶여 있으려고 하는가.

일본과 중국을 상대로 관광 수입을 올리려면 차리리 관광객이 몰리는 지역이나 상가에 일본어와 중국어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한자 문제는 국민 투표를 거쳐야 할 중대한 민족적인 과제임을 정부 당국은 깨달아야 한다.

이현복 서울대교수.한글학회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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