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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빼가는 외국인, 보고만 있을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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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30년대에 세계경제가 대공황으로까지 악화된 데에는 보호무역뿐 아니라 급격한 자금 유출입도 큰 원인이었다. 자금이 갑자기 빠져나가고 환율이 불안하면 모든 경제활동이 엉클어진다. 이것은 그 후 만들어진 세계경제 체제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경제 운용의 골격이 된 브레턴우즈 체제는 ‘국제통화기금(IMF)-가트(GATT)체제’라고도 불린다. GATT는 보호무역을 막고 자유무역을 촉진하기 위한 기구였다. IMF에 주어진 가장 큰 책무는 환율의 안정적 조정이었다. IMF가 단기자금을 공급해줌으로써 질서 있게 환율이 조정되도록 했다. 이를 위해 자본통제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대공황 당시 급격한 외화 유출입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은 중남미였다. 원자재 수출이 줄어들고 선진국 자금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경제가 초토화됐다. 중남미에서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이 나온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다. 세계경제에 참여해서 처음에는 ‘단물’을 함께 빨아먹을 수 있었지만 대공황이 벌어지니까 ‘쓴물’만 남게 됐다. 그러니까 선진국들과의 경제교류를 아예 절연(絶緣)하고 개도국끼리 잘 살아보자는 주장이 나왔다. 지금 동유럽 금융위기가 악화되면 사회주의로 다시 돌아가자는 얘기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영국도 큰 피해자였다. 금이 빠져나가면서 파운드화가 폭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래서 다른 나라보다 먼저 자본통제를 도입하고 내수를 부추기는 정책을 택했다. 경제학자 케인스는 이 경험 뒤 “돈은 가능한 한 내국 것을 쓰는 것이 좋다”는 말을 했다. 영국은 지금 또다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외국 금융기관들이 돈을 대거 빼내가니까 파운드화가 폭락하고 부도 위기까지 몰렸다. 브라운 총리는 그래서 “금융보호주의(financial protectionism)가 큰 문제”라는 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왜 자금 유출입 통제가 국제공조 대상에서 빠지는가. 선진국 금융기관들이 자신들의 문제 해결에만 급급해 거기에 방해되는 일은 거론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디레버리징’이다. 돈을 빌려 투자나 대출을 한 뒤 문제가 생기니까 이를 회수해서 부채를 다시 갚는 것이다. 자금회수에 통제를 가하면 디레버리징에 방해가 된다. 돈이 필요할 때 회수하는 것은 투자자의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신흥국들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신세가 됐다. 별로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선진국 금융기관들이 잘못 투자한 것을 메우는 데 돈 다 뺏기고 파산 위기에 몰려 있다. 하지만 신흥국들이 파산하면 선진국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간다.

세계경제가 악순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선진국들이 신흥국들에서 돈을 빼가는 것을 완화하거나 일시 중지하는 국제공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갑자기 돈을 빼가는 채권자들도 세계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 국제공조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개별 국가들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 디레버리징이 다 끝나고 투자가 돌아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 없다. 자본통제를 도입하고 선진국들에 협조를 구해야 한다. 미국도 한국도 금융기관들이 급격히 자금을 회수해서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질 때 법원이 나서서 중재하는 제도를 갖고 있다.

우리가 먼저 자본통제를 하는 것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실제로 미국은 이미 자본통제를 시행했다. 미 하원 자본시장 소위원회의 칸조스키 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지난해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후 1~2시간 동안 5500억 달러가 단기자금시장(MMF)에서 유출됐고 중앙은행이 돈을 계속 부어도 해결되지 못하자 각 계좌들을 정지시키고 미 정부가 25만 달러씩 보증을 해줬다”고 공개했다. 한국과 같은 신흥국들도 정부가 보증을 해주면서 돈이 천천히 빠져나가게 하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채권자들이 달라는 대로 돈 다 내주고 외환보유액을 바닥낸 뒤 IMF에 찾아가서 “나 이제 망했으니까 도와달라”고 손 벌리거나, 환율이 끝없이 올라가도록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학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