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作을찾아서>박라연씨 네번째 시집 "너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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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희고 붉게 피어나 지고 피어나 지던 이 세상 아름다운 꽃잎들처럼 우리들 저무는 한 해도 한 송이 꽃이라면 저렇게 온 산천을 희게 물들이는 눈송이들의 입술이었을지도 몰라 한 해가 저무는 촌가 언덕에 쌓인 새하얀 눈을 보면서 문득,뒷모습에 대해진지해진다'.
한 해가 저문다.크리스마스 이브가 지나면 정녕 한 해의 끝에서 위 시.낙화2'의 한 부분처럼 허겁지겁 달려왔던 우리의 뒷모습에 대해 진지해지리라.특히 전.노 두 전직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진행된 올해는 그 뒷모습에 대해 더욱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더러움.죄.고통.슬픔등 삶의 뒷모습,그 끄트머리에 다다라 그것들을 환한 꽃송이로 피워올려 이 춥고 허전한 계절을훈훈하게 채우는 시집 한 권이 출간됐다.
박라연(45)씨가 세번째 시집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을문학과지성사에서 최근 펴냈다.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온 박씨는.서울에 사는 평강공주'.생밤 까주는 사람'등을 펴내며 시인으로선 보기 드물게 일정한 독자 를.팬'으로 삼고 있다.삶에 밀착된 시어와 타고난 리듬 감각에 의해 쉽게 읽히면서도 고통의 절정에서 터져나온 범상찮은 심상들이 우리의 아픈 영혼에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깊은 겨울잠 그 이후에는,아직 남은 내 순수의 물방울이 어린/무 속살로,아직 남은 내 사랑의 울림이 선유도 깊은 산골짜기 도라지꽃으로,//이쯤에서 겨울잠을 선물받고 싶다.왔던 길 다시 가서 초행처럼'..겨울잠 네 흙 속으로 간다' 의 일부분이다.겨울잠과 흙 속이 연결되며 죽음의 이미지를 그리게 한다.
그러나 그 죽음은.순수'와.사랑'을 낳고 있다.이와같이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통으로써 순수와 사랑의 시를 물 흐르는 듯한 가락에 싣고 있는 시인이 박씨다.
.시와 더불어 살아온 모든 것들을 세월이 흐른 다음에 펼쳐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별처럼,보석처럼 빛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박씨는 그 시의 영롱한 결정체를 위해 원광대 국문과 박사과정도 밟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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