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구름 위 향연으로 끝난 도야코 G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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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풍광이 빼어난 도야코(洞爺湖). G8 정상회의가 열린 윈저호텔은 도야코의 호수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해발 625m의 포로모이(幌萌) 산 꼭대기에 있다. 낮은 구름이 산을 감싸고 흐르거나 호수에서 물안개라도 피어 오르면 윈저호텔은 초현실의 세계, 전설 속의 성(城)의 모습이다. G8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치면 31조5000억 달러. 세계 전체 GDP의 57.9%다. G8 정상들이 거기 오래 묵었다면 윈저호텔이 31조5000억 달러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G8이 아닌 나라의 정상들은 도야코에서 110km 떨어진 삿포로의 호텔에 묵어야 했다. 프레스센터도 도야코에서 30km 떨어진 루스쯔(留壽都)에 차렸다. 구름 위의 성주들에게 하계(下界) 의 사람 냄새, 땀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윈저호텔이 성이라면 삿포로와 루스쯔는 성 아래 마을, 일본 역사의 조카마치(城下町) 격이다. G8 정상들에게는 지구촌 전체가 조카마치다.

홋카이도의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하는 기아문제 논의에서 실속 있는 식량난 해결책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G8 정상들의 나라는 시장의 수요공급에 따라 특정한 작물을 재배하지 않는 농민에게 보조금을 준다. 사람 먹기도 모자라는 곡식을 바이오에너지 생산에 쏟아붓는다. 러시아는 곡물 수출을 통제한다. G8 정상들은 수출규제를 철폐하고 국제적인 식량비축 제도를 만들어 식량위기를 해결하자고 선언했다. 그러나 수출규제 폐지는 당사국의 재량에 달린 것. G8에 강제력이 없다. 곡물비축 제도는 경비가 엄청나게 든다. 둘 다 성 아래 빈곤지대에서 기아선상에 있는 사람에 대한 구제책이 못 된다.

G8 정상회의 최대 의제인 온실가스 감축문제에서는 의미있는 성과를 기대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8개국의 입장이 사분오열되어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7년 기준으로 50% 줄인다는 관념적인 합의에 그쳤다. 그것은 지난해 G8 정상회의 합의의 확인이다. 교토의정서가 규정한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의무는 2012년으로 끝난다. 2013년부터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다.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이다. 미국은 교토의정서를 보이콧하고, 중국과 인도에도 구속력있는 감축목표가 부과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물귀신 작전에 중국과 인도는 지난 100년 동안의 산업화 과정에서 온실가스를 무제한으로 배출한 선진국들이 먼저 구체적인 감축목표를 가지고 배출량을 줄이고 개도국에는 재원과 기술을 제공하라고 맞선다.

지구온난화는 이상기후를 낳는다. 태풍·가뭄·쓰나미는 직접적인 인명피해 말고도 곡물 생산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녹아 바닷물의 수위가 일정 수준 이상 상승하면 남태평양과 중국의 일부 해안지대, 유럽의 네덜란드 같은 나라의 국토가 바다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 끔찍한 재앙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기후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의 총량을 줄이는 방법에 관해서는 백가(百家)가 쟁명(爭鳴)한다. 지금으로서는 선진국들은 전체적인 배출감축 목표를 설정해 나라별로 배분하고, 신흥개도국은 구속력 없는 감축목표를 가지고 2020년이나 2030년의 중간 시점을 향해 감축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온실가스 감축을 초과 달성한 개도국에는 탄소배출권(Carbon credit)을 주어 감축목표를 채우지 못한 선진국에 파는 탄소거래 방식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도야코 연설도 그런 취지다.

도야코 G8은 구체적 방안에 합의할 수 없었다. 유럽연합(EU) 국가들과 일본이 저(低)탄소화 사회 이행에 선두를 달리는 데 반해 미국은 2015년까지는 온실가스 배출을 오히려 늘리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중국과 인도만 물고 늘어진다. 중국과 인도는 미국의 압력에 공동으로 대응한다. 이런 대목에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할 틈새가 보인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연설에서 한국이 준비가 덜 됐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보 부족 탓인지 선의의 무지 탓인지 연설이 빈약했다. 안에서는 중·장기 정책을 세우고, 기후변화와 온실가스 관계 국제회의에서는 우리 입장을 자신있게 개진할 수 있는 전문가집단 양성이 급하다. 냉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저탄소 경제가 주축이 될 조짐이다. 새로운 문명의 도래인지도 모른다. 정부는 주요 국가들의 이해충돌을 기회로 활용하고, 기업은 저탄소 경제로 구조를 전환하며, 국민은 에너지 절약형으로 생활 스타일을 바꿔나가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