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칼럼

짝퉁은 숭례문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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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숭례문 소실에 직접·간접으로 책임이 있는 그들이 이 참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놀랍다. 서둘러 복원 계획부터 말하는 그들의 저의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국민들의 관심을 복원 쪽으로 돌려 여론의 뭇매를 피해보려는 간지(奸智)인가. 이 당선인은 서울시장 시절 숭례문 공개를 강행하면서 이 나라 최고 문화재의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실책을 저질렀다. 오 시장과 유 청장은 서울 최고(最古)의 목조 문화재를 반사회적인 인간과 노숙자들의 반달리즘(문화 파괴)에 방치한 직무태만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시간은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 들어간다. 숭례문이 숭례문인 것은 그 안에 600년 동안 쌓이고 고인 긴 기억과 시간 때문이다. 그 안에서 시간은 소용돌이치고 반복되었다. 숭례문은 흘러드는 현재를 품어 역사를 만드는 무한대의 그릇이었다. 거기에 혼과 시대정신이 깃들었다. 숭례문 목조건물이 화염 속에서 무너질 때 숭례문이 품고 있던 시간의 흔적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숭례문의 완전한 복원은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숭례문을 죽였다. 어떤 경우에도 문화재에 대한 반달리즘을 정당화할 동기는 있을 수 없지만 숭례문이 한 개인의 가장 저급하고 반문화적이고 반역사적인 분노로 소실된 것이 더욱 비통하다.

다시 세울 목조건물을 숭례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편의상의 약속이요 기호일 뿐이다. 숭례문이라는 기호는 불타버린 숭례문의 본래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을 국보 1호로 부를 것인가는 600년 뒤 우리 후손들이 결정할 일이다. 그때쯤이면 새로 지은 ‘숭례문’은 21세기에 지은 수많은 목조건물 중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이 당선인과 오 시장은 서둘러 이른 시간 내의 복원을 말하는데 그건 사건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발언들이다. 짝퉁 숭례문은 숭례문이 아니다. 불타버린 숭례문을 계승할 건물을 짓는다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철저한 준비를 하여 적어도 21세기의 건축물로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천년 궁궐을 짓는다』의 저자인 대목장 신응수씨는 “목공사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는 말한다. “모르는 사람들은 베어낸 나무를 바로 쓰는 줄 알고 있는데 대략 3년의 건조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재목으로 쓰이게 된다…. 생목을 제재해 바로 쓰게 되면 마르면서 조금씩 비틀어져 건축물의 변형을 초래할 수도 있다.” 중요 무형문화재인 대목장 최기영씨는 “건조 기간을 줄이기 위해 찜통에서 찌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방식으로 하면 나무가 터지고 돌아가서 쓸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시간의 문제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 충분히 크고 질이 좋은 소나무를 구하는 일이다. 숭례문에 쓰이는 서까래는 60~70년 이상, 골조나 도리는 150년 이상 된 소나무라야 한다. 그런 소나무를 구하려면 오랜 시간 백두대간을 뒤져야 한다. 최기영 대목장의 말대로 땅은 좁은 데다 베어서 쓰기만 하고 심지는 않아서 궁궐이나 문화재급의 건물을 짓는 데 필요한 적송과 육송의 절대량이 부족하다. 책상머리에서 간단히 기간은 3년, 예산은 200억원이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방화범은 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것이다. 숭례문 하나 지키지 못한 우리는 애처로운 숭례문의 형체를 보면서 정신적인 형벌을 실컷 받아야 한다. 총체적 국력에서 소프트 파워의 비중이 커진 오늘 문화재의 존재가치에 대한 국민적 인식 전환을 위해서도 머리와 몸통 없는 숭례문의 슬픈 잔해는 오래 거기 있어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