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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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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 영화가 나오기까지 27년 걸렸다. 이 사실만으로도 의미 있을 수 있다. 1980년 광주를 본격적으로 그린 첫 영화 ‘화려한 휴가’(김지훈 감독)다. 총제작비 100억원대의 블록버스터. 1000만 신화에 빛나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를 잇는, 현대사 소재 감동 스토리, ‘실화’영화다.

영화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10여 일을 따라간다. 평범한 광주시민들이 어떻게 해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 감동적으로 그린다. 주요 배역들은 실존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TV뉴스로 익숙한 ‘80년 광주’의 대표 이미지들도 재현했다. 속옷 차림으로 끌려 나와 몽둥이 세례를 받는 시민들, 아버지 영정을 든 소년, 태극기로 뒤덮인 관과 시위 차량들은 우리를 당장 ‘그날’로 데려간다. 도청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자 진압군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하는 장면은 가위 충격적이다.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해방 광주’에 대한 강조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의 말대로 “시민군의 관점에서 본 최초의 광주 영화로, 부당한 국가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시민들이 총을 들었던 반란의 역사를 용기 있게 재현했다.” 참혹한 학살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극 속에 피어나는 유머와 연대, 인간적 존엄에 초점을 맞췄다. 이 해방구에 지식인이 배제된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러나 ‘해방 광주’의 감격스러운 재현이 모든 아쉬움을 덜어 내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광주의 10여 일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듯하지만 ‘전형성’과 ‘추상화’의 덫에 갇힌다. 가령 학살 직전 광주는 ‘동막골’ 수준의 평화로운 일상을 구가한다. 정치적 진공상태를 살아가던 순박한 이들이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악마적 외부인(군인)에게 희생당하는 얘기다. 발포명령 등 사건의 전 과정은 ‘전 장군’의 지시에 충실한 이름 모를 중간 군인에 의해 이뤄진다.

영화의 엔딩은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라는 가두방송의 호소다. 그렇게 영화는 27년 전의 집단기억을 다시 호출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문다. 지금 우리에게 80년 광주가 갖는 의미를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영화가 건드리는 것은 전혀 다른 지점이다. 광주를 몰랐거나 아니면 점차 잊어가는 이들의 죄책감이다. 또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잇는 ‘역사적 피해자에 대한 감상주의적 호소’다. 흠뻑 울고 나서 마음 한구석 찜찜함이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죄의식을 소비하는 영화’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