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칼럼] 정부 권한 축소가 21C 민주주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호 26면

블룸버그

영국의 새 총리 고든 브라운이 10년을 기다린 끝에 정상에 올랐다. 그는 1994년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의원인 토니 블레어 전 총리에게 총리직을 양보했다. 노동당의 개혁을 주도하던 두 사람은 당시 ‘정권을 잡을 경우 블레어가 먼저 총리직을 맡고, 다음에 브라운에게 넘긴다’는 약속을 했다. 블레어가 총리를 맡는 동안 브라운은 재무장관을 맡아 경제정책을 책임지기로 했다.

97년 노동당이 집권에 성공했고, 블레어가 10년간 총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브라운은 재무장관으로 영국 경제를 살려놓았다. 그간 2인자로서의 설움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은 묵묵히 블레어를 지지했고, 경제 호황 덕분에 블레어는 3연임이라는 대기록을 이룰 수 있었다.

늦었지만 블레어는 약속을 지켰다. 이라크 전쟁 참전 이후 떨어진 인기 때문에 마지못해 물러났지만. 어쨌든 브라운의 등장으로 영국은 진짜 노동당 시대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브라운은 블레어와 함께 노동당의 좌파 노선을 혁파한 주역이지만 기본적으로 블레어보다 훨씬 노동당적인(좌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3일 첫 의회 연설에서 브라운이 밝힌 국정 구상은 앞으로의 영국 사회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기에 요약해 소개한다(괄호 안은 편집자 주).

정부에서 갖고 있는 권한을 의회와 국민에게 넘김으로써 영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는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영국의 미래와 번영을 지켜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개혁이다. 개혁을 통해 정부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복으로서의 의무를 더욱 충실히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이 단기간에 간단한 법 개정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 제안하는 내용은 앞으로의 개혁을 논의하는 출발점이자 차후 논의의 가이드라인이 될 것이다.
총리와 정부는 수백 년간 왕실의 이름으로 특권을 행사해 왔다. 국민과 국민의 대표로 뽑힌 의회와의 협의가 부족했다. (영국의 총리는 거의 모든 결정을 독단적으로 행사하는데, 주요한 결정의 경우 형식적으로는 여왕의 이름을 빌려 공포한다. 시정연설의 경우 여왕은 의회에 참석해 총리가 작성해준 연설문을 그대로 읽는다.)

아래와 같은 12가지 분야에서 총리와 행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자 한다.

1.선전포고권 / 2.의회 해산권 / 3.의회 소집권 / 4.국제조약 비준권 / 5.주요 공직자 임명권 / 6.정보기관 감독권 / 7.주교 추천권 / 8.판사 임명권 / 9.검찰 지휘권 / 10.공공서비스 감독권 / 11.여권 관할권 / 12.사면권 등이다.

(이상은 총리와 행정부가 의회의 동의 없이 행사하는 주요 권한의 대부분을 포괄한다. 국제조약의 경우 의회의 비준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선전포고나 의회 해산 등과 같은 중요한 결정의 경우 총리가 결심해 여왕에게 통보하면 여왕이 그대로 발표한다. 여왕이 결정을 바꿀 수 없으며, 의회와 국민의 동의 절차가 필요하지도 않다. 철저한 내각책임제인 데다 총리가 과반수 다수당의 총재이기에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대부분의 경우 총리가 의회 지도자들과 사전에 어느 정도 협의한다. 브라운 총리는 보다 확실하게 제도적인 차원에서 의회의 행정부 견제 권한을 보장하겠다는 의지다. 특히 선전포고권 제한의 경우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이라크 참전을 무리하게 결정한 데 대한 국민적 비난을 의식한 결정으로 보인다.)

이상과 관련된 행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의회의 권한을 확대하는 것은 21세기 영국의 민주화를 위해 불가피하다. 전쟁과 평화와 같은 결정적인 선택은 궁극적으로 의회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회의 소집과 해산은 의회 스스로 결정해야 맞다. 주요 공직자의 임명에 관한 의회의 권한도 확대되어야 한다. 의회가 청문회를 열어 후보를 검증해야 한다.(고위직에 대한 검증 장치로는 미국 상원의 인사청문회가 대표적이다. 영국의 경우 이 같은 절차가 없이 총리가 임명하면 된다. 브라운 총리가 미국식 검증 방식을 도입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식 검증 장치 역시 당파적 이해 다툼이나 프라이버시 등 여러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대국민 서비스와 직결된 공직이나 시장에 영향을 주는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고위 공직 등에 대한 검증을 먼저 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앞으로 의회와 국민의 감시를 받기 위해 각종 행정 정보를 정기적으로 공개하겠다.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각종 정보 및 경찰·군 등 관련 기관 간의 협력을 통합 조정할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만들겠다. 그리고 정보기관의 대국민 신뢰를 얻기 위해 의회의 통제를 받도록 하겠다. 각종 사면이나 여권 및 비자 관련 통제 역시 정부가 아니라 의회가 맡을 수 있어야 한다.

행정부의 권한은 축소하지만 책임은 더욱 강조할 것이다. 고위 공직자들이 지켜야 할 새 윤리규정을 만들겠다. 고위 공직자들을 감시할 감독관을 새로 임명하겠다.

이상과 같은 행정부와 의회·국민의 권한을 명확히 하는 명문화 작업이 필요하다. 불문법(不文法)의 전통을 지켜온 영국이지만 이를 위해 성문법(成文法)을 만들거나 새로운 권리·의무 장전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국정의 근간을 바꾸는 중대한 문제이기에 앞으로 법무장관을 통해 의회 및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도록 하겠다. 앞으로 각종 청문회 등 여론 수렴 과정을 통해 국민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같은 국민적 합의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안전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근간이 되리라 믿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