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폭로에도 철학과 근거가 있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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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주초에 시작된 한나라당의 대통령 측근 비리 폭로 공세가 나흘째 계속되고 있다. 야당이 집권세력 주변의 비리를 조사하고 폭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한나라당이 '폭로주간'을 예고하면서 제기한 의혹들의 함량이 문제다. 마구잡이식 폭로란 냄새가 물씬 나기 때문이다.

우선 폭로 내용에 크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주장처럼 야당이 수사권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구체적 증거자료까지 제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사실을 확인하려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한다.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대선 후 기업들로부터 9백억원을 받았다"거나 "청주 K나이트클럽 사장 이원호씨와 친.인척 명의 차명계좌에서 수백억원의 비자금이 노무현 대통령후보 캠프로 갔다"는 주장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崔씨가 盧대통령의 오랜 집사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의 비중으로 따져볼 때 받았다는 액수가 지나치게 많다. 'S그룹 3백억원, 통일교 관련그룹 3백억원'이란 얘기는 재계에서는 웃음거리다. 재벌도 아닌 지방 유흥업소 주인이 수백억원을 대선자금으로 제공했다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물론 대선 후 기업들이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대통령 측근들을 집중 공략했을 수 있고, 지방 업체가 대선자금을 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폭로는 곤란하다. 오죽하면 DJ정권 때 '폭로 전문가'였던 정형근 의원이 "폭로에도 철학과 도덕과 팩트(사실)가 있는데, 지금 한나라당의 폭로에는 팩트가 없다"면서 "폭로했을 때 국민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의혹이 갈 만한 사실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겠는가.

한나라당은 부정적 여론이 일자 자제할 듯하더니 폭로전을 계속하기로 했다고 한다. 측근 비리 특검을 수용하도록 압박하는 차원에서 야당이 근거 있는 폭로를 하는 것조차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같은 당 의원이 비상대책위의 폭로 요구에 '자료 불충분'을 이유로 거부할 정도라면, 그런 첩보 수준의 폭로전은 당장 중단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