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족은 세일즈 귀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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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올해초 영국의 정신지체장애인들을 돕는 자선단체 ‘세인’이 옥스포드에 연구센터를 열었다.4백만파운드(약 80억원)의 기부금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기부자는 브루나이 국왕(1백만파운드)과 사우디 아라비아 국왕(1백75만파운드),그리스 선박왕 크실라스 가문(1백75만파운드) 등 거물들이다.

영국의 작은 자선기관이 이런 거물로부터 거액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찰스 왕세자 덕이었다.세인의 대표인 마조리 왈라스가 찰스 왕세자에게 부탁해 얻은 성과들이다.특히 브루나이 국왕의 경우 찰스 왕세자가 폴로경기에 특별손님으로 초빙해 극진히 대접하면서 기부를 부탁하자 마음을 움직인 케이스다.

영국의 더 타임스가 지난 17일 보도한 왕실의 '보이지 않는 공로' 사례다. 왕세자뿐 아니다. 왕위 계승순위가 낮은 왕족도 역할에선 뒤지지 않는다. 여왕의 사촌인 글로스터 공은 세계 정상급 세일즈맨이나 마찬가지다. 영국의 건축설계회사 GMW는 모잠비크의 대규모 리조트 건설 프로젝트(1억파운드, 약 2천억원 규모)를 통상사절단 대표로 현지를 방문한 글로스터 공의 주선을 통해 따냈다.

왕족들의 특기는 일반 기업인이 접근하기 힘든 외국 원수나 최정상급 사업가를 상대로 한 '고공(高空) 세일즈'다. 5년 전 영국의 건축업협회 관계자들은 필리핀에서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일정을 잡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글로스터 공이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동행한 기업인들을 만나달라"고 요청하자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바로 다음 일정 두 건을 취소하고 이들을 만났다.

2년 전 여왕의 둘째아들인 요크공 앤드루 왕자가 국제통상투자유치단의 명예대사로 임명됐을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할 일 없는 명예직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를 설득해 남아공항공이 새로 구입하는 에어버스 항공기에영국의 롤스로이스 엔진을 달게 했다.

영국 왕실의 이 같은 세일즈 외교에 대해 영국 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왕실은 교역의 문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연다"면서 "이는 수치로 계산할 수 없고,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엄청난 기여"라고 평가했다. 특히 중동 지역의 왕정 국가와 영연방 국가가 많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특효'를 보인다고 귀띔했다.

브리티시에어웨이의 회장인 마셜 경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지금의 왕실은 이전보다 훨씬 자주 세계를 누빈다"며 "왕족을 환영하지 않는 경우가 없어 그 뒤를 따르는 기업의 마케팅에 활로를 열어 준다"고 설명했다.

영국 왕실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예산은 연 3천6백만파운드인데 왕실 시설에서 거두는 관광수입은 이보다 훨씬 많다. 왕실 보물이 보관된 런던타워의 연수입이 약 2천2백만파운드, 본가인 윈저성은 매년 1천만파운드를 번다. 부속 궁전인 햄프턴 코트와 켄싱턴궁, 여왕의 거처인 버킹엄궁이 매년 1천5백만파운드의 입장료를 거둔다. 따라서 영국 왕실은 글로벌 경쟁시대에도 매우 실질적이고 '생산성 높은' 제도인 셈이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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