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도 아닌데 왜…" PD들이 카메라 앞에 서게 된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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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PD로그’는 관찰자 입장에서 연출해 온 PD들이 카메라 앞에서 직접 직업을 체험하며 노동의 가치를 담아내는 프로그램이다. 사진 EBS

EBS ‘PD로그’는 관찰자 입장에서 연출해 온 PD들이 카메라 앞에서 직접 직업을 체험하며 노동의 가치를 담아내는 프로그램이다. 사진 EBS

한겨울보다 차갑다는 3월의 바다에 뛰어드는 해녀, 로프 두 줄에 의지해 7층 건물 외벽을 청소하는 로프공….
이른바 ‘극한 직업’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은 그간 많이 있었다. 주로 연예인 등 유명인이 힘들고 험한 일을 직접 체험하는 내용이었다. PD와 작가 등 제작진은 그 고된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관찰자였다. 카메라 뒤에서 출연자의 생고생을 지켜보던 PD들이 이번엔 직접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극한 체험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6일 첫 방송한 ‘PD로그’는 EBS PD들이 직접 다양한 직업을 체험하고, 노동의 가치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프로그램이다. 3~13년 차 PD 7명이 제각각 경험한 직업 노동기를 15부작에 걸쳐 선보인다.

‘PD로그’가 방영되는 매주 월요일 저녁 9시 55분은 원래 EBS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인 ‘다큐프라임’이 편성됐던 시간대다. EBS로서는 PD를 전면에 앞세운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채널의 황금시간대에 편성한 셈이다.

‘PD가 브이로그를 한다면?’에서 착안

PD들은 해녀, 로프공, 주간 요양보호사 등 다양한 직접을 직접 체험한다. 사진 EBS

PD들은 해녀, 로프공, 주간 요양보호사 등 다양한 직접을 직접 체험한다. 사진 EBS

‘PD로그’는 PD가 브이로그(V-log·일상을 기록한 영상)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지난 9일 경기도 고양시 EBS 사옥에서 만난 ‘PD로그’의 이동윤(38)·정석희(38)·황신록(28) PD는 회사로부터 처음 프로그램의 기획 방향을 듣고선 난감했었다고 떠올렸다.

9년차 정 PD는 “연예인도 아닌데 왜 카메라 앞에 서야 하고, 시청자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됐다”면서 “나영석 등 카메라 앞에서도 대중과 친근한 PD가 있긴 하지만, 모든 PD가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3년차 이 PD는 “촬영 초반에는 카메라 앞에 서면서도 그동안 해왔던 대로 카메라 앵글과 편집을 미리 계산하고 있더라. 또 제 얼굴이나 목소리가 영상에 담긴 것이 영 어색했다”고 털어놨다.

촬영은 쉽지 않았지만, 카메라 뒤에만 섰던 오랜 PD 생활에서 느끼지 못한 것들을 경험했다. 1화 해녀편을 촬영한 정 PD는 “조연출 없이 제가 직접 고프로를 들고 찍거나 작가가 핸디캠으로 촬영한 것이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내레이션도 직접 입히는 등 말 그대로 가내수공업 같았다“면서 “과거 연출했던 ‘지식채널e’처럼 포맷에 적응해 관성처럼 제작하는 프로그램과 아주 달랐다”고 말했다.

'PD로그'가 방영되는 월요일 저녁 9시 55분은 EBS 대표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주요 편성 시간대다. 사진 EBS

'PD로그'가 방영되는 월요일 저녁 9시 55분은 EBS 대표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주요 편성 시간대다. 사진 EBS

이 PD는 “카메라 뒤에만 있다가 앞으로 나갔다는 것은 그만큼 PD의 시각이 중요한 프로그램이라는 의미”라면서 “45분의 방송 시간을 제 시각으로 채울 수 있다는 점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로프공에 도전한 그는 “수십명의 훈련생들과 5일 동안 배우고 일을 시작했는데, 정작 로프를 타는 사람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만큼 힘든 직업”이라고 떠올렸다. “고수익 일자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고층 빌딩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5~10년 넘게 업으로 삼는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졌다”면서 “이러한 제 생각이나 자의식·취향을 반영할 여지가 있는 프로그램이라 한편으로는 잘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났다”고 했다.

주간 보호센터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한 황 PD는 “촬영 분량은 3~4일이면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일에 대한 희로애락을 더 깊이 담아내고 싶어 일주일 간 일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요양보호사들은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해서 섭외부터 어려웠다”면서 “그들의 고된 모습을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고군분투했다”고 말했다.

“유튜버 아닌 방송국 PD만이 할 수 있는 콘텐트 모색”

“요즘 사람들은 일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쉬운 것 같아요. ‘이거 안되면 다른 거 하지’ 이렇게요.” ‘PD로그’ 해녀편에서 60년 가까이 물질을 해온 해녀는 이같이 말한다. 이 PD는 해녀의 말에 느끼는 바가 컸다고 했다.
“10년 넘게 일을 했지만, 언제까지 PD를 할 수 있을지 하루하루가 흔들리는 시간이에요. PD 일이 힘들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건 ‘명의’, ‘세계테마기행’처럼 대중의 마음이 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매력적이기 때문이죠.”

‘PD로그’ 제작에 참여한 (왼쪽부터) 13년차 이동윤, 3년차 황신록, 9년차 정석희 PD. 사진 EBS

‘PD로그’ 제작에 참여한 (왼쪽부터) 13년차 이동윤, 3년차 황신록, 9년차 정석희 PD. 사진 EBS

콘텐트 환경이 급변하는 요즘, PD라는 직업에 대해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PD로그’를 통해 데뷔한 3년차 막내 황 PD는 “입사 후에도 업에 대한 고민은 계속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유튜브 등 새로운 콘텐트를 많이 보지만, 방송국 PD로서 할 수 있는 콘텐트는 분명히 있다”는 것이 고민의 결론이다.

중견에 접어든 정 PD는 “‘PD로그’는 뉴미디어의 흐름을 따라가 본다는 차원도 있었지만, EBS만의 가치를 담는 것도 중요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위기보다는 기회의 측면이 크다고 생각한다”면서 "유튜브 콘텐트와 달리, 덜 자극적이지만 의미 있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콘텐트를 만들어내면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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